최선달 명창(崔先達 名唱)
상태바
최선달 명창(崔先達 名唱)
  •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무형유산학과 교수>
  • 승인 2021.09.09 08: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도풍의 소리조가 중심인 가운데 경기·충청의 민요조가 가미돼 다양한 가락이 선을 보였다. 또한 수많은 명창들이 판소리조의 노래를 작창(作唱)했으며, 자신의 장기라고 할 만한 ‘더늠’을 정련(精練)하거나 개발했다. 양반 지식층을 겨냥한 단가(短歌)들이 지속적으로 나왔다. 단가를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일컬었던 데서 단가가 출현하게 된 배경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여러 토막소리들이 모여 어엿한 ‘한 바탕’을 이루어 나가기 시작했다. <중략> 19세기 약 100년은 판소리가 모색기-실험기-발전기-융성기를 한꺼번에 겪은 시기였다. 다양한 실험과 노력을 통해, 또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통해 판소리를 발전으로 이끌었다.(이하 전(轉)과 결(結)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 충청도 일대의 중고제 명창들에 살펴보겠다.)

1. 崔先達 名唱

  唱巫尸祝崔先達
  昨弩今扇移意活
  初祖開山位已高
  美人茫渺在天末

최선달은 굿판에서 
신주처럼 받들던 분
어제는 활을 당기더니 
오늘은 왜 부채 쥐었을까
바꾼 마음 시들지 않았네

산문(山門)을 처음 연
초조(初祖) 같으신 분
위상이 이미 높건만
미인은 지금 어디 계신가
하늘 끝에서 가물가물

[해설]
하은담(河殷潭)과 함께 한국판소리의 선구자로 꼽히는 명창 최선달. 그는 생몰연대가 분명해 판소리 300년사의 기점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전주신청(全州神廳)의 대방(大房)으로 오래 있었다고 한다. 그의 본관은 해주(海州)로, 나와는 동종(同宗)이다. 연전에 최선달 명창 기념비의 비문을 내가 찬한 바 있는데, 그의 가계를 보면 무인 집안으로 부친은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됐고 그 자신도 ‘선달’이라 일컬어졌다. ‘선달’은 본시 문·무과를 가리지 않는 칭호였으나 조선 후기에 가면 무과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얻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사용됐다. 칼을 잡고 활을 쏘던 사람이 무슨 연고로 부채를 쥐고 소리를 하게 됐던가. 참고로 지난 2016년 7월 17일에 필자가 짓고 홍성결성농요보존회에서 세운 ‘최선달 명창 기념비문’을 소개한다.

국가와 민족이 시련을 겪을 때마다 시대의 빛이 되었던 지사(志士)와 열사(烈士) 그리고 훌륭한 예술인을 많이 배출한 홍성군은 의리의 고장이요 예술의 고장이다. 홍성의 역사 인물 가운데 한국판소리 250년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긴 분이 있으니, 그가 바로 판소리의 선구자 최선달 명창이다. 

최명창의 본명은 예운(禮雲)이며 선달은 별칭이다. 해주최씨 좌랑공파(佐郞公派)의 후예로, 조선 영조 2년(1726)에 오늘의 홍성군 결성면 성남리 578번지에서 태어나 순조 5년(1805)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십대조인 환(瓛)이 덕산현감(德山縣監)으로 있을 때 이웃의 결성 고을과 인연을 맺었고 팔대조인 사(泗)가 결성현감으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후손들이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부친 춘기(春起) 공은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최명창은 18세기 양반출신 비가비 명창의 대표적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소리에 남다른 재질이 있었다. 석당산과 누에산, 풍거섬 등 여러 곳에서 득음(得音)을 위한 피나는 수련 과정을 거쳤으며, 팔십 평생을 판소리의 기초를 닦는데 헌신했다. 그는 천안시 목천면 출신의 하은담 명창과 함께 조선광대의 효시로 평가를 받는다. 두 명창이 무당굿에서 부른 ‘춘향전’이 판소리 춘향가의 시초라고 한다. 조정에서 최명창에게 명예직으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했는데, 품계를 받은 명창은 그가 처음이다. 

최명창의 판소리는 결성의 농요(農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만물소리는 최선달이 직접 창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결성농요는 1993년에 있었던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현재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후손인 최광순과 최양섭이 초대 예능보유자로서 활약을 했으며, 소리꾼의 다수가 최명창의 후손이다.

최명창의 묘소는 본디 결성면 성남리 중리마을에 있었으나 2014년에 금곡리 해동마을로 옮겼다. 이장을 계기로 결성농요보존회에서 최명창을 선양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지난날의 구비(舊碑)까지도 같은 장소에 함께 세워 후인들에게 길이 본을 보이고자 한다.

자료제공=결성향교 선비문화축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