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겨울 앞에 까만 연탄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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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겨울 앞에 까만 연탄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 황희재 기자
  • 승인 2021.11.07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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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 사랑과 아름다운 봉사활동 추진 행사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광천중 동문들. 왼쪽부터 강신욱, 김욱환, 편기범, 김재수, 김정로 동문.

광천의 우리말 지명인 ‘너른내’처럼 이번 활동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나가길
아직도 연탄으로 겨울나는 가정 많아… 어려운 이웃 위해 연탄 배달하는 동문행사 
1946년 개교해 지금까지 1만 4000여 명 졸업생 배출 명문중학교 자긍심

파란 지붕을 가진 2층짜리 주택 입구에 들어서자 밤 굽는 냄새가 가득했다. 1층에 마련된 별채에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타닥’ 소리를 내는 군밤을 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거 그만 구워야 되는 거 아녀?”
“그거 끄라니까 왜 자꾸 불을 키는겨.”
“제가 킨 거 아녀유~.”

잠시 후 껍질이 잘 벗겨진 노란 군밤이 취재 수첩 위에 올려졌다. ‘군밤 인터뷰’의 시작이었다. 군밤은 서민들의 대표적인 겨울철 길거리 간식이다. 추운 겨울날 군밤이 잔뜩 든 종이봉투를 손에 쥐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광천중학교총동문회는 완연한 가을 날씨를 뒤로하고 곧 다가올 겨울을 맞이하며 오는 7일 ‘광천 사랑과 아름다운 봉사활동 추진 행사’를 개최해 추운 겨울을 보내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군밤이 돼 정을 나누기로 결정했다.

지난 1946년 개교해 1만 4000여 명이 졸업한 광천중학교는 과거 4개 군 11개 읍면의 학생들이 입학시험을 치르러 오던 학교였다. 강경과 함께 충남의 2대 상업도시로 불리며 2만이 넘는 인구가 상주하던 광천은 시간이 흘러 8500여 명이 모여 사는 조그만 동네가 됐다. 이 중 2300명 정도가 독거노인이며, 아직도 연탄을 때는 집이 마흔 가구가 넘는다고 한다. 
 

광천중학교 56회 졸업생인 방송작가 겸 코미디언 유병재(사진 왼쪽). 광천여자중학교(1973년 분리, 2014년 재통합)를 졸업한 가수 강민주(본명 김화연·사진 가운데). 광천중학교 17회 졸업생인 소리꾼 장사익(사진 오른쪽).

광천중학교는 여느 명문학교들이 그렇듯 장사익(17회), 강민주(광천여중 졸업), 유병재(56회) 등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인과 대통령상을 3회나 수상한 웅변계의 대부 편기범 고문(14회), 최건환 한국종합유원시설협회장(19회) 등 각계각층에서 저명한 인사들을 배출했다. 35년간 총무를 맡아 왔다는 김정로 고문(14회), 장학위원장인 이원갑(14회)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원갑 장학위원장(14회)은 “3개교가 통합하면서 다수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나눠 주다보니 소액으로 지급될 우려가 있어 대상자를 25명으로 압축해 지급하고 있다”면서 “저소득층이나 불우한 상황을 겪고 있는 학생에게 지급하는 특별장학금은 장학생 1명을 선정해 지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천중학교 장학위원회는 일반장학생과 특별장학생말고도 지난해 신입생 45명 전원에게 입학 장학금을 지급했고, 올해 신입생 전원에게도 입학 장학금을 선물했다. 모든 장학증서에는 장학위원들의 이름이 들어간다. 동문들의 참여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함이다.

용머리장학회를 설립한 김재수 고문(17회)은 “주축이 돼서 동문회를 이끌어 주고 있는 14회 선배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며 “후배로서 선배들에게 좋은 본을 받고 있고, 앞으로 선배들이 낸 길을 잘 따라가겠다”고 전했다.      
   
보통 동문회 행사라 함은 체육대회나 기수별 친선게임, 맛있는 음식과 함께하는 노래자랑, 경품권 추첨 등으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뭔가 해보자’라는 취지로 획기적인 동문회 행사를 기획했다. 

광천에서 10~11월 무렵부터 다음해 3~4월까지 필요로 하는 연탄은 연간 700장 가량이다. 이 중 절반인 350장은 국가가 지원하는데, 광천중학교 총동문회가 나머지 절반에 50장을 더 준비해 400장을 전달하기로 했다.

오는 7일 열리는 광천중학교총동문회 행사에서는 동문들이 모여 광천 지역 내 연탄 사용 가구를 직접 방문해 연탄과 쌀 20kg, 그리고 광천 소재 ㈜백제(대표 김미순)에서 제조한 즉석 떡국을 위문품으로 전달한다.

이날 행사에는 동문인 소리꾼 장사익과 가수 강민주도 참석하며, 방송인 유병재는 촬영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지만 그의 아버지 유인구(광흥중 졸업) 씨가 대신 참석을 약속해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군밤 인터뷰’를 함께한 이원갑 장학위원장(14회), 강신욱 운영위원(14회), 김정로 고문(14회), 편기범 고문(14회), 김재수 고문(17회), 김욱환 사무총장(30회)도 작업복을 입고 행사에 참여하며, 김병수 재경회장(24회)도 먼 길을 달려오기로 약속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중책을 맡아 지난 2년간 최선을 다한 신석열 총동문회장(26회)은 이번 행사를 위해 기부금을 기탁했다. 

원로 동문인 김영철 고문(4회)은 “연탄은 나르지 못해도 기부금은 내겠다”며 힘을 보탰고, 이밖에도 여러 동문들이 이번 활동에 함께 참여한다. 동문회는 먼 길을 오는 동문들에게 교통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편기범 고문은 언어 전문가답게 광천의 우리말 지명인 ‘너른내’를 활용해 이번 활동의 의미를 소개했다. 

“‘너른’의 두 번째 사전적 의미는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나간다’는 뜻입니다. 우리 활동이 우리에서 그치지 않고 홍성 전역으로, 보령으로, 청양으로 번져가길 희망합니다. 그래서 이 활동을 꼭 선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음악회에 버스를 수 십대 대절해 동문들을 초대하는 것보다도 이런 활동이 훨씬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군밤을 호호 불어 먹던 광천의 소년 소녀들은 추운 겨울 길을 걷는 이웃에게 따뜻한 군밤을 나누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10월의 마지막 날, 광천의 파란 지붕 아래에서 만난 이들의 마음에서는 군밤보다 더 따뜻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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