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뜻 그리고 법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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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뜻 그리고 법치주의
  • 이상권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1.12.0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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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이전의 왕조국가에서도 체계적인 법이 존재했다. 중국의 대명률, 조선의 경국대전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 시절 사회의 질서유지와 안정을 위해 개인의 행위를 규율하는 한도 안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을 두는 정도였지만,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현대국가에서는 법이 개인의 행위규율을 넘어서 ‘정책(공공정책) 수행의 수단’으로 확대·변화됐다.

국가와 공공기관의 ‘정책’이란 사회적 이슈(공공의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권력에 의해 결정된 장기적 방침을 의미한다. 정권(권력의 주체)은 자신이 결정한 정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정책의 수행에 방해가 되고, 그런 사람이 많으면 정책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권력의 주체는 수립한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입법부를 통하여 ‘법’이라는 ‘강제력’을 동원하게 된다. 정책수행에 방해가 되는 행위에 대해 그 ‘법’을 동원해 형벌, 행정벌을 비롯한 각종 제재를 가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권력의 주체는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국가와 사회의 미래상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그러한 미래상은 헌법에 규정돼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혁명 또는 쿠데타의 방법으로 급진적 사회변혁을 이뤄내 기존의 미래상을 뒤엎고 새로운 미래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또한, 때때로 국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사이에 특정 정치적 이념을 추구해 점진적 사회변혁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정책’은 권력의 주체가 그리고 있는 미래의 사회상을 구현시키려는 정치적 의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사회상을 권력 주체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는 집단 또는 그 정책의 시행으로 손해를 보게 될 것이 예상되는 집단은 그 정책에 반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력의 주체가 눈에 잘 뜨이지 않을 정도로 점진적 사회변혁을 시도하는 경우에는, 국민들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정책을 받아들이게 되며, 반발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히틀러의 나치는 괴벨스를 통해 선전·선동으로 ‘대중정치’라는 새로운 정치 모형을 실현했다. 값비싼 라디오를 모든 가정에 무상으로 보급해 히틀러의 연설을 듣게 하는 방법으로 나치 체제의 우월성을 각인시키고, 노동자들의 반감을 무마하기 위해 ‘국비지원 휴가보장 정책’을 실시했으며, 모든 국민에게 자동차 소유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는 ‘폭스바겐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중산층이 몰락하는 극심한 경제적 혼란을 틈타서 ‘선전·선동과 사탕발림’이라는 정책으로 정권을 다진 것이다.

1936년 봄 총선에서 독일 국민의 히틀러에 대한 지지율은 98.8%였다. 권력 주체의 선전·선동과 무상 지원이라는 꿀단지에 취한 나머지, 노동의 가치와 자본의 중요성, 그리고 마구 뿌려지는 공짜 돈이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망칠 것인지에 대한 통찰이 없었던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에게만 세기적 전쟁과 인권 범죄의 책임을 모두 물을 수 없고, 공짜 돈에 취해서 정의를 외면했던 독일인 모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법치주의의 시작은 입법이다. 히틀러와 나치의 정책도 그들의 입법부가 제정한 법에 근거를 두고 시행됐다. 하지만 이렇게 통치의 편의성에 맞추어진 법은 정의의 이념과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것으로서 법치주의가 말하는 법이 아니다.

법은 입법에서부터 절차적 정당성을 갖춰야 하고, 실질적인 정의를 표상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절차적, 실질적 요건을 충족하는 법에 따라 통치를 하는 것이 법치주의의 요체이며, 이를 감시하는 역할은 사법부에 맡겨져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결국 국민의 몫이다. 국민이 국민에게 맡겨져 있는 법치주의의 최후 보루라는 역할을 포기한다면 언젠가는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올 수도 있다.

차기 대통령선거가 코앞에 닥쳐왔는데, 여야의 유력 후보자가 공교롭게도 모두 법조인 출신이다. 그런데 법치주의가 민주주의의 핵심 요체인데도 불구하고, 이들 대통령 후보자들은 모두 “정의의 이념과 그 이념에 입각한 정의로운 법에 따라 통치하겠다”고 말하지 않고,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하겠다”고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국민의 뜻’이 옳지 않을 수도 있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국민의 뜻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 당장의 권력 쟁취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더 이상 ‘공짜 돈’이나 ‘그들의 국민의 뜻’이 ‘진짜 국민의 뜻’을 왜곡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나의 사법연수원 동기인 윤성근 판사의 글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에서 한 문장을 빌려온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의 이름을 써내려갔던 그 갈망과 열정이 이 땅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면, 법치주의를 향한 공감과 믿음의 확산이 민주주의를 꽃피울 것이다.”

 

이상권 <변호사·전 국회의원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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