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시대 독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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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시대 독서의 의미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2.06.0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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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독서는 일부 지식인과 권력층의 전유물이었다. 근대 이전까지 보통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접할 수가 없었다. 일단 대다수의 사람들이 쓰고 읽을 수 있는 능력, 즉 문해력을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서양에서 근대 이후, 즉 구텐베르크 인쇄술과 산업혁명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 인쇄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예전보다 책을 훨씬 더 쉽고 값싸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산업혁명으로 경제적 부가 축적되고 여유 시간이 생기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자층도 늘어났다. 당시 늘어난 독자층 가운데 대부분은 ‘중산층’이었고, 나중에 그들은 시민 계급으로 성장하며 시민혁명을 주도한다. 서양 근대사의 중핵을 ‘인쇄술’, ‘산업혁명’, ‘시민혁명’으로 요약할 때 그 중심에는 ‘책’이 있다.

예전에 독서는 종이로 된 책을 직접 읽는 행위에 국한됐다. 책을 접할 방법은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아니면 서점에서 구입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 독서의 방법과 방식은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이 종이로 된 책뿐만 아니라 전자책을 읽는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자책은 점점 보편화돼 가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전자책에 적응하고 있고 필자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예전에는 종이책이 먼저였지만 지금은 종이책과 전자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다. 책이 아니라 인터넷 콘텐츠를 읽는 것도 독서의 일종이다. 인터넷 콘텐츠는 기사, 사설, 블로그 포스트, 웹툰, 동영상 등 다종다양하다. 그렇다면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는 것 또한 독서일까?’ 만일 개인적으로 그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은 ‘그렇다’다.

예전에 독서는 수동적이고 일방향적인 행위였다면 지금은 능동적이고 쌍방향적 행위다. 독자는 이제 저자의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생각을 개진하며 적극적으로 독서에 참여한다. 독자는 더이상 저자의 권위에 주눅이 들거나 복종하지 않는다. 독자는 저자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 독자의 생각이 저자의 생각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독자가 저자가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독자와 저자의 위상이 달라졌다. 유튜브 세상 속의 독서는 독자와 저자의 변화된 위상을 잘 예거한다.

김성우와 엄기호의 공저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2020)에서는 유튜브 세상 속에서 독서는 민주주의에 기반한 행위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민주주의가 갈등을 조장하고 분란을 야기한다며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표출한다. 하지만 원래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충돌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면 당연한 현상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하나의 의견으로 모을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려는 시도 자체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하는 행위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책을 읽지 않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두려움과 죄책감 대신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책을 꼭 읽어야 할까?’,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절대적으로 맞을까?’, ‘책에서 말하는 내용을 꼭 따라야 할까?’ 책을 안 읽는다고 두려움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즉 책을 많이 읽었다고 자랑할 일도 아니고, 책을 읽지 않았다고 두려워하고 죄책감을 느낄 일도 아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남들보다 지적 능력과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책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사실 책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도구가 된 것도 역사적으로 오래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18세기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 계급이 대두됐다. 그들에게는 지식에 대한 갈증, 교양에 대한 갈증, 지적 욕구라는 약간의 허영도 있었다. 그들이 생각한 교양은 라틴어로 쓰인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이었다. 영국의 작가 알렉산더 포프는 그리스 로마 시대 고전을 영어로 번역해서 잡지에 실었는데 소위 ‘대박’을 쳤다. 본의 아니게 그는 최초의 근대적인 전업 작가가 됐다. ‘소설’이라는 ‘새로운’(novel) 문학 장르도 이 시기에 태동했다.

19세기 말 일본은 서구 유럽을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국가 주도로 유럽의 많은 책을 번역해 소개했다. 당시 번역한 책 중에는 문학 작품이 많았다. 사실 세계문학전집은 이렇게 출발했다. 일본의 이런 전통이 그대로 우리나라에 이식됐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세계문학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럽, 특히 서유럽 중심의 문학이다. 지금까지도 이 책들은 ‘고전’이라고 불리고 있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두려움은 정확히 말하면 고전을 읽지 않는다는 두려움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고전은 누구나 읽은 것 같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특히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남들은 읽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읽었다는 자기 위안의 발로일 수도 있다. 우스갯소리로 주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는 말처럼 더 폭력적인 말은 없다”고 말하곤 한다. 책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읽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책은 도구일 뿐이다.

중고등학교 국어, 영어 등 언어 과목의 교과 과정은 주로 읽기로 구성되어 있다. 시험은 대체로 객관식으로 출제된다. 중고등학교에서 객관식 시험을 선호하는 이유는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 때문이다. 대학 시험 역시 마찬가지다. 전공과 교양 모두 성적 평가가 상대평가로 이뤄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표준화된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다. 성적 평가에 창의성을 반영한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다. 최근 들어 문해력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어느 책에서는 문해력을 ‘미래의 중요한 경쟁력’으로 정식화한다.

여러 전문가들은 문해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독서를 꼽는데, 독서는 읽기와 쓰기 활동이 연동돼야 한다. 글의 종류에 관계없이 읽고, 쓰고, 말하고, 더 나아가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비판적인 능력을 키워야 한다. 어휘와 문법은 문해력을 향상시키는 데 필수 도구다. 어휘와 문법은 이론이 아닌 글을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실제에서 키워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결코 없다.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변해야 한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책읽기 모임에서 함께 책을 읽고 토론했고, 성인들을 대상으로 북클럽을 진행했고,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왜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작가 특강을 여러 차례 진행했다. 특히 중고등학생들에게 인문 고전이 무엇이고, 왜 인문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문 고전 독서는 청소년 인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청소년 역량 증진에 기여하고, 자발적인 참여 의지를 제고한다고 말했다. 인문 고전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고 읽어야 할 책의 목록까지 제시했다. 그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그게 과연 올바른 행동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독서 운동은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정식화된다. 이를 추동하는 게 바로 계몽주의다. 계몽주의란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무지를 깨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성적 사고를 가리킨다. 계몽주의는 전근대적 요소에서 벗어나 근대적 요소를 습득하는 일체화된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일체화된 사고에 토론의 공간은 없다. 오직 지식의 전달과 습득만 있을 뿐이다. 주지하듯 근대의 목표는 훈육과 교화다. 근대의 학교, 병원, 교도소 등은 이 목적에 충실하게 봉사한다. 지금까지의 독서 운동은 근대 계몽주의의 자장 안에서 틀 속에 무리 없이 작동되었다. 하지만 유튜브 시대가 도래한 바로 이 시점에서는 계몽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튜브 시대 독서 운동은 지식의 전달과 습득 중심에서 마땅히 ‘토론’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자기 삶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서울대 선정 도서 100권’ 가운데 과연 몇 권이 자기 삶과 맞닿아 있는가? 독서의 본령은 소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소통을 이야기하면서도 속도와 숫자에 천착한다. 소통에서는 속도와 숫자보다도 방향이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독서에서는 무엇을 읽고 있는지 또는 얼마나 읽었는지보다도 어떻게 읽고 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토론이 필요하다. 누구나 알고 있고 반박하지 않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소통을 위한 토론이라면 성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유의미한 결론이 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원래 토론의 목적은 결론을 내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의견과 내 생각을 견주는 게 토론의 본령이다. 독서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을 통해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변화를 끌어내지 못해도 괜찮다. 독서가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반드시 좋은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좋은 삶은 누가 보장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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