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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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은 누구?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07.26 13: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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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출신 슬라보예 지젝(1949~ )이 6월 하순 한국을 두 번 째 방문하여 경희대학교와 건국대학교에서 강연을 했다. 이 강연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좌석표를 나누어 받아야 했다니 한국에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른 듯하다. 그러나 국내에서 인기가 많은 것과는 달리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그의 철학이 해독 불가능해 보인다고 철학의 난해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헤겔, 하이데거, 라캉 등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탈구조주의자들이 그의 철학 뿌리에 맴돌고 있기에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철학자인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미디어들은 30여권의 단독 저서와 수십 권의 공동저서가 있는 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동구권의 기적’, ‘철학을 더럽힌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있다. 이런 표현은 그가 가장 급진적인 좌파 철학자, 유럽의 변방에서 나타난 걸출한 인물, 철학을 하위문화와 연결지어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비하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어느 비평가는 21세기가 지젝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그를 추켜세우기도 한다.

일부 층에서 인기 있는 것과는 달리, 서양철학과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지 않으면 지젝의 이름이 생소하게 여겨질 수 있다. 지젝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된 것은 1995년 ‘삐딱하게 보기’라는 책인데, 이 책을 통해 지젝은 헐리우드 영화의 욕망세계를 전복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젊은 시절 영화를 만들어 보기도 했던 지젝은 특히 히치콕에 관심이 많아 그의 영화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지젝의 명성이 서구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대중문화 해석보다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저술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과 같은 철학관련 서적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까다로운 주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시차적 관점’같은 책들은 독일 철학과 프랑스 철학을 천착(穿鑿)하고 있다.

지젝의 책 중에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것은 현실 문제를 다루는 현실정치에 관한 책일 것이다. ‘실재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라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같은 책들은 이라크 전쟁 뿐만아니라 세계 곳곳의 사건에 관심을 내비친다. 금년에는 쟈스민 혁명을 다룬 책도 국내에 번역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지젝은 요즘 중국, 브라질, 인도와 같은 나라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만, 미국은 늘 그의 관심의 대상이다. 2001년 뉴욕 맨하탄에서 충격적인 9.11테러가 발생했을 때 이 사건은 선민의식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에게는 경악이었으며, 지젝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제 20차 공산당 전당대회와 같은 대 전환점이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1956년 2월에 열린 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쵸프는 스탈린 비하 연설을 하며 관련자들을 숙청할 것을 암시하자 어느 당 간부가 기절을 하기도 했다는 살벌한 전당대회를 말한다.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상징계’의 몰락을 의미한다. 즉, 이제까지 믿어왔던 개념적 가치체계의 붕괴다.

9.11을 이슬람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충돌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젝은 자본주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로 진단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하여 세상의 혁신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곳곳에서 이런 징후가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월가점령’이다. 경제적으로 1%가 99%의 다수를 지배하는 것은 시스템의 문제이지 자본가의 탐욕만을 비판해서 현실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수정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방책일 뿐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고, 모두의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코뮤니즘(공산주의)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러나 20세기의 공산주의는 역사상 가장 매혹적이었지만 실현되었을 때 가장 파괴적인 이념이었고, 가장 인간다운 세상을 표방했지만 처참한 독재로 추락했던 이념이다. 그러나 지젝이 예상하는 코뮤니즘은 이미 시도했거나 실패한 공산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구체적인 공산주의의 모습을 밝히지 않았듯이 지젝도 그 세계의 구체적인 모습을 펼쳐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사유해보라고 권유한다. 그래서 공허한 내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칸트가 주장했던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하여 함께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젊은이들에게 가슴 떨리는 혁명가로 다가오며, 미디어들은 그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고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 달 전에 출간된 ‘코뮤니스트’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도 ‘마지막 공산주의 국가가 사라졌을 때에도 공산주의는 오랫동안 사후의 삶을 누릴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것은 빈곤과 억압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공산주의는 뿌리 내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스탈린이 혁명을 앞두고 헤겔의 ‘대 논리학’이라는 책에 주석을 달아가며 꼼꼼하게 새로운 세계를 꿈꾸어 보았듯이 지젝도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는가? 그러나 지젝은 스스로를 비관론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젝은 세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직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니 ‘사유하라’고 그리고 ‘실천하라’고 외친다. 대통령 형님을 비롯한 권력의 언저리가 돈으로 썩어갈 때,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어 대부분이 백수의 신세를 면치 못할 때, 가진 자들이 자기들만의 리그를 즐길 때, 즉 공정한 분배가 이 사회에서 요원하다고 느낄 때, 돈을 향하여 세상이 거침없이 질주 할 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은 많아지게 마련이다. 즉, 정의와 희망이 사라질 때 누군가는 새로운 세상의 매뉴얼을 꼼꼼하게 준비할지 모른다.

지젝은 ‘20세기의 공산주의는 다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하면서, 분단국가인 한국은 ‘공산주의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마음에 새겼기 때문에 희망의 땅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 지젝의 철학이 스타벅스 커피처럼 유행따라 소비되는 이론인지 알 수 없지만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받아들일 만하다.

20세기의 위험한 철학자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 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홍주일보·홍주신문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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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하늘 2012-08-16 23:06:15
정의와 희망이 사라질 때 누군가는
새로운 세상의 매뉴얼을 꼼꼼하게 준비할지 모른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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