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 역사와 정신까지 빼앗긴 ‘홍주의사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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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역사와 정신까지 빼앗긴 ‘홍주의사총’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2.08.23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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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군민들도 모르게 ‘홍성의사총’으로 명칭 바뀌어


국모의 비참한 주검 앞에서 당시 이 땅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을사조약’으로 조국이 스러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백성들이 흘린 눈물은 또 어떠했을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슬픔이고 아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의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그들은 국가가 위급할 때 의(義)로써 곧바로 일어나 싸우는 사람들, 즉 민군(民軍)인 의병(義兵)이었다. 비록 그것이 역사의 미완으로 끝났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독립된 조국 대한민국을 마주하고 있다.

조국의 신성한 제단에 아낌없이 목숨을 바친 홍주벌 의병들이 잠든 ‘홍주의사총’엔 부질없는 궂은비가 통곡으로 내리고 있다. 따라서 홍주의사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도 슬프게 아파오고 있다. 홍주성전투에서 의롭게 순절한 병오항일의병(1906년)의 넋이 묻혀있는 국가지정 사적 제431호인 ‘홍주의사총’이 슬그머니 ‘홍성의사총’으로 명칭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또다시 통곡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홍성’이란 지명, 1914년 일본에 의해 만들어져
‘홍주지명역사 1000년을 기념하자고, ‘홍주’라는 역사적인 토종이름을 되찾자’고 외치고 있지만 우이독경인 현실이다. 이제는 여기에 더해 ‘홍주’의 역사와 정신까지도 깡그리 빼앗겨 버리는 한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충남도청이전 신도시 명칭을 결정할 때도 주민들의 의견이나 주장이 전혀 무시된 채 홍성과 예산의 갈등을 고려한다는 순전히 행정적 사고로 접근하다가 지나간 버스 손드는 격이더니 이번에도 역시나이다. 결론은 ‘홍주’라는 본래의 토종이름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데서 연유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홍주’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홍성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일제 강점기 충남 공주와 홍주의 일본식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지난 1914년 ‘홍주군’의 ‘홍’자와 ‘결성군’의 ‘성’자를 합쳐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으로 일제에 의해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홍주의병의 기상이 서린 항일의식을 희석시키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해석에 설득력이 더하고 있다. 홍주는 예부터 충신과 의인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고려시대 최영 장군과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 중 한사람인 성삼문 선생,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 선사와 백야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 충절의 고장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과거 목사고을 중에서 유일하게 본래의 토종이름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곳도 이곳 ‘홍주’ 지금의 ‘홍성’이라는 아픈 역사의 도시다.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로 995년에 도단련사를 두고, 1012년 지주사로 고쳤다가 홍주로 다시 고쳤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1358년에 목으로 승격하여 1368년 지주사를 두었다가, 1371년 다시 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1895년에 군이 됐고, 1914년 옛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이 됐다. 결성은 본래 백제의 결기현인데 신라 때 결성으로 고쳐 서림군의 영현이 되고, 고려시대 운주에 이속되었다가 1172년에 감무를 뒀다. 우왕 때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1390년에는 진성을 두고 유민을 정착시켰다. 조선시대인 1413년 현감을 두었다가 1895년 군으로 승격, 1914년 홍주군과 결성군, 보령군의 일부를 통합하여 홍성군이 됐다.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승격하고, 1942년 광천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1983년 2월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서산군 고북면 대사리와 결성면 와리를 갈산면에, 홍동면 월림·대평·운용리를 광천읍에, 결성면 중리를 서부면에, 홍북면 내법리, 홍동면 구룡리를 홍성읍에 각각 편입하여 현재와 같이 홍성·광천읍, 갈산·결성·구항·금마·서부·은하·장곡·홍동·홍북면 등 2개 읍, 9개 면으로 개편됐다. 결국 ‘홍주’라는 지명은 1914년 일제에 의해 ‘홍성’으로 바뀌었지만 1941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승격할 때까지 ‘홍주’라는 이름은 그대로 이어졌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홍주’라는 지명의 등장은 고려 초부터로 기록하고 있다. 최초로 태조 10년인 927년경부터 추정하고 있으나 ‘홍주’라는 행정구역명이 채택된 것은 현종 3년인 1012년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홍주의사총엔 홍주사람들, 홍주의병이 묻혔지”
“홍주의사총엔 홍성사람들만이 아닌 홍주사람들이 묻혔지, 그 당시엔 홍성이란 이름 자체가 없었는데 무슨 홍성을 운운해. 홍주는 지금의 홍성을 포함한 인근지역 전체였어. 몰상식의 극치지” 1906년(병오년)에 일어난 병오항일의병들이 홍주성전투에서 의롭게 순절한 넋이 묻혀 있는 ‘홍주의사총’이 주민들도 모르는 사이 ‘홍성의사총’으로 이름이 바뀌는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한 탄식이다. ‘홍주의병’의 역사적 왜곡으로 인한 역사적 정체성과 정신이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진실의 역사가 담긴 고유의 이름이 사라진 꼴이다.

1906년에 일어난 ‘홍주의병’을 1914년 일제에 의해 이름이 바뀐 ‘홍성의병’으로 이름을 바꾸는 일이 벌어진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설명이 불가한 일이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에 의해 역사와 정신, 고유의 명칭이 왜곡되고 변질되는 순간이다. 역사인식도 상식도 기본적인 교양마저도 무시되는 행정과 정부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중국의 역사왜곡이나 일본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역사왜곡과도 전혀 다를 바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와 정체성을 포함한 가치를 보존하고 계승하여 발전시켜야 할 문화재청이 앞장서 저지른 일이기에 가히 충격적이라는 반응이다. 더불어 홍성군청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대처하지 않은 책임은 면키 어렵게 됐다.

문화재청의 이번 명칭 변경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명칭에 대해 통일적 기준인 지역명 병기 등의 기준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한계성은 전국 해당 지자체별로 끊임없는 이의제기 등이 잇따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번에 명칭이 변경된 홍성군내 국가지정문화재는 사적 2곳과 보물 2점이다. 사적 제431호인 ‘홍주의사총’은 ‘홍성의사총’으로 바뀐 것을 비롯해 사적 제231호인 ‘홍주성’은 ‘홍성 홍주읍성’으로, 보물 제538호인 ‘홍성동문동당간지주’는 ‘홍성 오관리 당간지주’로, 보물 제355호인 ‘신경리 마애석불’은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으로 변경하는 등 홍주를 없애고 홍성을 붙이거나 고유명칭 앞에 무조건 홍성을 붙이는 등 행정편의적 발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이유다.

이번에 고유한 이름이 바뀐 ‘홍주의사총’은 1906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거한 의병대장 민종식을 중심으로 홍주성에 모인 1200여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산화한 900여 의병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1949년 4월 5일 홍성군수 박주철과 박헌교 경찰서장이 직원들과 함께 나무를 심다가 의외로 많은 유골을 발견했는데, 홍주성에서 싸우다 전사한 의병들의 유골이 임시 매장됐다는 증언 등과 일치하고 그 사실이 판명돼 당시 도비(道費) 300만환으로 분묘를 조성했다. 지난 1973년부터 충청남도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로 지정, 관리해 오다가 1999년 국가지정문화로 신청해 2001년 8월 17일 지방문화재에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31호로 승격됐다. 홍성군은 지난 1990년부터 국비 등을 지원받아 구역을 확장하고 묘역을 정비하는 등 대대적인 성역화사업을 추진했다. 1992년 ‘홍주구백의총(九百義塚)’이란 이름을 900명이 묻혔다는 사료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마다 5월30일 순국의사에 대한 추모제향을 지내고 있는 천년 홍주의 역사이자 정신이며, 상징으로 살아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홍주의병, 홍주의사총과 관련한 독자여러분들의 소중한 의견과 사료 등을 접수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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