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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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2.0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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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단어는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 민족, 언어, 종교, 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사용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특히 다민족국가인 미국 등에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차별과 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는 의미에서 힘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니그로와 아메리카 인디언 대신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북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에스키모 대신 이누이트, 유피그, 알류트 등 각 부족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치적 올바름은 일상 언어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영어에서 남성은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미스터’지만 여성은 미혼은 ‘미스’로 기혼은 ‘미시즈’였다. 하지만 지금은 ‘미즈’로 통칭하고 있다. ‘미즈’라는 단어가 처음 만들어진 게 1971년이었고 한참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국인과 불법이민자를 가리키는 비시민권자와 서류미비자도 정치적 올바름의 한 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신교 성경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개역 성서에서 ‘형제’라고 번역되었던 낱말을 ‘형제자매’로 바꾸었다. 오랜 기간 동안 사용돼 온 여류 소설가, 여의사 등과 같은 단어도 이제는 좀처럼 쓰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은 여성이 전문직에 종사한다는 희귀성 또는 특별함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언어의 문법 구조가 그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의 사고에 영향을 준다는 사피어-워프 가설과 관련돼 있다. 일부 언어학자들이 어떤 종류의 언어를 쓰느냐가 인간의 사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고 여기고 있지만, 이 가설을 확대해서 해석하면 언어가 인간의 사고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성차별적인 어휘를 쓰면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차별적이라고 여기는 용어를 바꾸려고 할 때 그 용어를 당사자들은 오히려 수용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평론가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지나치게 만연하게 되면, 사회가 전체주의 사회가 되고, 집단적인 압력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상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금지법 제정과 같은 정치적 올바름의 법제화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차별이나 편견 없는 언어를 사용하자는 원래의 취지에서 점점 외연을 넓혀 각종 소수자 운동과 소수자 우대 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 정치적 올바름은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것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역효과를 야기한다는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2018)는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가지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마이클 에릭 다이슨과 미셸 골드버그가 정치적 올바름을 찬성하는 입장이라면 조던 피터슨과 스티븐 프라이가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열정적인 ‘흑인’ 사회학자인 다이슨은 흑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흑인을 존엄한 개인으로 보는 문화를 정립하는 데 정치적 올바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성’ 칼럼니스트인 골드버그는 남녀차별을 없애는 데 정치적 올바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피터슨은 정치적 올바름을 “혐오스러운 개념”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프라이는 정치적 올바름의 독선, 분개, 비난, 성토, 창피 주기에 불쾌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일반적으로 좌파는 정치적 올바름을 찬성하고, 우파는 정치적 올바름을 반대한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프라이는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레토릭이 전적으로 우파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그는 우파 진영에도 정치적 올바름이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우파 진영에서는 상대방이 ‘레드넥’이라는 표현을 쓰면 무례하고 공격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참고로 레드넥은 ‘교육 수준이 낮고 교양이 없는 가난한 백인 노동자’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용어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올바름이 어느 한쪽 진영에만 해당되는 사안이 아니다. 토론을 차단하고 논란을 일으키는 수법이다. 그는 다양성, 포용, 평등이라는 미명 아래 나쁜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고, 그것이 더 큰 포용과 더 많은 다양성이 지연시킨다고 말한다. 프라이는 정치적 올바름을 어느 한쪽, 그가 보기에는 좌파가 일방적으로 장악한 게 보다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골드버그는 토론자들이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 규제법에 대해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자유주의적인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지만 혐오표현 규제법은 지지하지 않는다. 그녀는 시민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권리를 대치시키는 이분법은 기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어떤 집단을 차별하는 것은 개개인이 충분히 자신을 표현하고 잠재력을 실현하고자 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구성원 개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을 추구할 수 없다면 여성, 유색인종 개인이 누릴 권리도 없어진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시민권 운동은 서로 대치되지 않는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접근한다. 계몽주의에 따르면 전통적인 구조에 신세를 지지 않더라도 인간의 자유는 확대되고 결과적으로 문화도 바꿀 수 있다.

좌파와 우파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견지한다. 좌파는 정치적 올바름이 인류가 응당 취해야 할 정의로운 가치라고 주장한다. 반면 우파는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개인을 말살하는 그릇된 개념이라고 반박한다. 찬성 측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올바름은 말하고 행동할 때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상식적이고 당위적인 태도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골칫거리가 된 까닭은 특권을 가진 계층이 그것이 특별한 경우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 측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올바름은 개인을 배제하고 집단적인 정체성만을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은 겉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의 결핍’ 대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도덕 또는 윤리 논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보와 보수 간의 정치 논쟁이다. 개인적으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찬성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올바름은 분명히 사회의 진보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예전보다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정책들이 더 많이 입안되고 실행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은 불평등과 차별을 보정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 그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불평등과 차별을 보정하기 위해 결과적 평등을 지향할 때 그 한계가 분명해진다.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은 마땅히 구분되어야 한다. 결과의 평등은 선의와 관계없이 자칫 피터슨의 지적처럼 역차별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런데 현재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내용보다도 태도에 있다. 정치적 올바름을 두고 처음에는 가치와 사회의 방향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현재는 가치와 주장보다는 주로 태도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즉 상대방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보다는 상대방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이는 이 책의 논쟁에 참여한 참가자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정치적 올바름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적 의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질 때 이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다. 일단 편을 가르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심지어 의견이 같다고 하더라도 태도와 취향이 다르면 이를 문제 삼고 공격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보다도 인정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정치적 양극화로 전화되기도 한다.

원래 정치적 양극화는 ‘정치 엘리트나 유권자들이 상호 적대시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정치적 양극화는 가짜뉴스 확산을 부추긴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상대 정당에 대한 혐오가 강할수록 가짜뉴스 기사를 더 많이 공유한다. 정치적 양극화는 다른 정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보는 타자화와 이들을 싫어하고 불신하는 혐오, 그리고 심지어는 이들을 도덕적으로 사악한 사람들로 보는 경향인 도덕화 현상이 강해 종교 분파 간 갈등과 유사한 분파주의 특징을 보인다.

정치적 양극화는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고 지지하는 정치인을 강하게 지지하는 ‘포지티브’ 방식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을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뀐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등 다른 여러 나라에서의 최근의 선거를 보면 정치적 양극화를 쉽게 목도할 수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하나의 유행 또는 현상이라고 불러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양극화의 세기와 정도는 점점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누군가는 정치적 양극화를 두고 “같은 레일 위에서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나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정치 분석가인 에즈라 클라인의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2020)는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의 역사를 일별하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20세기 미국 정치가 정체성을 두고 왜 그리고 어떻게 양극화되었는지, 그 양극화가 우리가 세상과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의 나머지 절반은 정치 시스템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양극화한 정치적 정체성과 양극화한 정치 기관들 사시의 순환 고리를 다룬다.

원제 ‘우리는 왜 양극화되는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는 양극화는 결국 서로를 미워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즉 정치적 의견의 대립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변한다. 증오와 분노의 끝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클라인은 오늘날 미국은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양극화 상태에 놓여 있고, 양극화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클라인은 양극화라는 개념을 손쉽게 ‘악’으로 치부하지도, 특정한 문제적 인물이 없으면 곧바로 해결될 일시적 현상으로 보지도 않는다.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시스템에 대한 그의 입체적 분석은 때로는 속 시원하고 때로는 자성을 촉구한다. 자기만 옳다면서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 문법이 당연해진 ‘이상한 정치의 시대’를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건너갈 수 있을까?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선택을 유심히 돌아보게 한다.
클라인은 2016년 미국 대선, 즉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상정한다. 일반적으로 2016년 미국 대선은 그 이전의 선거들과 다르게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하지만, 클라인은 정확한 수치 분석을 통해 2016년 대선은 이전의 대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에 따르면 2004년 선거부터 2016년까지 총 네 번의 선거에서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의 변동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지각 변동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일반 대중의 지지 추세만 본다면, 2016년 대선이 눈에 띌 정도로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클라인이 생각하기에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유독한 시스템은 선량한 개인들을 손쉽게 타락시킨다. 우리에게 가치를 배반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가치를 줄 세워서 우리가 서로를 배반하도록 한다. 각자에게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이 집단으로 행해질 때는 파괴적인 것이 된다.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해서 당보다 나라를 우선하고, 권력자보다 국민을 대표하고, 파벌을 챙기기보다 공동선을 추구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진보적 저항 세력은 기득권이 되고, 대중의 환멸이 시작되며, 유권자들은 반대편으로 슬슬 움직인다. 이 과정은 쳇바퀴 돌리기처럼 계속되고, 정치에 대한 분노와 환멸만 계속 쌓여간다. 문제는 계속 나빠지는데, 이미 실패한 방법으로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클라인은 미국 정치에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는 서로 간에 분열을 초래하고 정치 참여자들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형성하는 가장 큰 이유로 양극화를 꼽는다. 대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정치 기관들과 정치인들은 더 양극화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기관과 정치인들이 점점 양극화함에 따라, 대중은 더욱 양극화하는 방식으로 순환이 이뤄진다. 양극화한 정치 기관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대중은 더욱더 양극화한다.

양극화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수가 있는데, 핵심은 미국 정치판의 모든 사람이 정체성 정치를 한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체성을 형성하고 변형한다. 정체성은 우리 내부에 자연스럽게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에도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정체성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있고, 아주 약한 신호나 멀리 있는 위협에 의해서도 너무나 쉽게 활성화된다.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진지하게 말할 수 없다.

사실 정체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적 정체성은 변화하고 있고 강화되고 있다. 오늘날 정치적 정체성은 가장 강력한 정체성으로 최근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다른 정체성을 포괄하고 증폭해왔다. 정체성 정치는 뭔가를 드러내기보다는 가린다. 이는 정치적 토론의 장에서 더 강한 집단의 관심사를 합리적이고 적절하게 보이게 하고 약한 집단의 관심사는 이기적이고 특수한 호소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관심사를 축소하고 신뢰성을 떨어뜨리게 하는 데 사용된다.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논쟁에서 찬성 입장에 있던 골드버그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타깃이 되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체성을 빼고는 사람들의 정치적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체성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모든 정치는 정체성에 영향을 받는다. 정체성은 눈에 보이지 않거나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만연할 때 가장 강력하다. 하지만 정치는 정체성 찾기라는 공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체성은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지만 기계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정체성이 단수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어지러울 정도로 복수다. 우리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정체성이 있다. 일부는 서로 충돌하고, 어떤 것들은 위협을 받거나 우연히 작동될 때까지는 휴면 상태에 있다. 정체성은 ‘우리의 마음’이기에 바꿀 수도 없앨 수 없다. 단지 관리되고 다스려야질 뿐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양극화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치적 양극화는 관리되고 다스려져야 한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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