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꿈을 향한 출가, 고된 문하생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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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꿈을 향한 출가, 고된 문하생 시절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4.13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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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즈음 소년 이응노의 그림 솜씨는 동리(洞里)에서 제법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아버님 강권에 못이겨 학교를 자퇴한 후 농사일과 집안일을 돕는 틈틈이 병풍을 그리고, 갓집, 빗접고비 빗접(머리 빗는 도구를 담아두는 기구)에 꽃이나 새를 그려 넣어주며 어려운 살림을 도왔다. 그리고 그때 당시, 도제식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았던 이응노는 체계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염재 송태회(宋泰會) 선생께 사사했으나, 이 배움도 잠시, 여러 사정으로 곧 그만두어야 했다. 그림 그리기를 반대하던 유학자 집안의 명분과 점점 기울어져가는 현실적 상황의 암묵적 동의 사이에서 더 많은 그림을 그려야 했고 점점 훤훤장부(喧喧丈夫)가 돼갔다.

열여섯 무렵의 이응노는 아버님의 반대에 신식교육도 받지 못하고, 그토록 원하던 그림도 마음껏 그리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늘 자신이 친구들에 비해 개화되고 있는 문명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고, “새 시대의 거대한 물결이 다가오는데도 우리 집만이 동떨어진 채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런 것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의 새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때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하듯, 아버님 몰래 상투를 잘라 버린 일로 어른의 대노를 샀고, 며칠을 집안에 발도 못들이고 숨어다녔던 일도 있었다.

열아홉 청년이 된 이응노는 자신의 새 인생을 개척하고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1922년 서울 상경을 감행했다. 여비를 좀 얻을 요량으로 청양에 살고 계시던 누님댁을 찾아갔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음이 눈에 훤해 아무런 말도 못 건네고 다시 서울길을 재촉했다. 우연치 않게 들른 청양 비봉면에 당도했을 즈음 동리에서 이응노를 알아보는 홍성 동향사람을 만나게 됐다. 그의 그림 솜씨를 기억해주었던 동향사람의 주선으로 산제당(山祭堂) 산신(山神) 탱화(幀畵)를 그리는 일을 맡게 됐고, 덤으로 주재소 일본 순사의 청으로 호랑이 한 마리를 더 그리게 됐다. 당시 하루 장정 품삯이 20~30전 하던 때 이 일로 6원을 벌었다 한다. 그리고는 청양에서 천안역까지 걸어가 생전 처음보는 기차를 타고는 이내 서울로 내달렸다 한다.

혈혈단신 외돌토리로, 의탁할 곳 없는 서울에 입성은 했으나, 이내 하루 끼니와 잠잘 곳을 해결해야만 했다. 어느 날, 종로지역을 돌아다니던 중 장의사 집 앞에서 상여에 단청을 하는 것을 보고는 일하면서 배우고 싶다는 청을 넣어 그 집 일꾼이 됐다. 그리고는 서울 상경의 큰 뜻이었던 자신을 일깨워 줄 조선 화단의 스승을 찾았다. 그러던 중 조선말 화단의 대표적 인물인 해강 김규진 선생을 찾아가 문하(門下)에 들게 해줄 것을 수차례 간청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았다. 당시 행세깨나 하는 집안 자제들이 해강의 제자 되기를 소원해도 되지 않는 일을 이응노는 스승과의 대담 중 ‘어떠한 일이 있어도 스승께 반듯이 배우겠다’는 배포 하나로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생각처럼 문하생의 하루하루는 그리 녹록지는 않았다. 스승의 서생 노릇과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가며 밤중에나 그림 그리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전통적 교육 방식에 따라 스승의 그림을 모사하고 산수, 인물, 화조, 사군자, 영모, 어해, 기명절지 등 문인화법과 서예를 두루 익혀 나아갔다.

아울러 스승의 사숙에만 그치지 않고 해강 김규진의 ‘서화연구회’와 변관식, 이병직 등이 동인으로 있는 ‘고려미술원’의 연구생으로 습작기를 보내는 등 2년여의 노력 끝에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풍죽> 작품으로 입선을 하며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았다. 그리고 일취월장한 이응노에게 스승은 호(號) 죽사(竹史)를 하사했고, 금강산이나 남쪽지역 등 산수기행을 나설 때 동행할 만큼 이응노를 아끼게 됐다. 완고했던 부친 역시 무단가출하다시피 한 아들이 서화가로서 신문에 대서특필된 후에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기쁜 마음에 서울로 한달음에 달려와 아들 이응노를 마주할 수 있었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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