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업의 바탕,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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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업의 바탕, 언어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4.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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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같은 사실을 이야기 하더라도 입담이라는 각자의 재간에 따라 재미와 전달력은 천차만별을 이룬다. 문학 역시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로 전개되는 소설인 픽션(fiction)과 사실에 근거를 둔 논픽션(nonfiction)으로 구분하지만 결국 허구라는 상상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소설가요 영화감독이요 배우가 아닐까 싶다.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말은 희론(論), 즉 헛소리다. 그래서 언어(言語)라 할 때 언(言)은 진리, 진실, 객관성이라면, 주관적 표현인 나의 말로서 어[語=言+吾]는 언제나 진리에 부합돼야 한다. 따라서 문학을 비롯한 상상력의 행위(문화예술)들이 진리에 다가서는 도구로 유용할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삼류소설 등이 지탄받는 것도 이와 같은 연유다.

언어는 인간만이 지니는 특별한 능력으로 다른 종과 명확히 구별된다. 그래서 호모 로퀜스(Homo loquens-언어적 인간)라 부르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사회는 언어라는 상상력의 표현으로 감성이라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들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개인적으로는 좌우명이요, 문화산업에는 관심을 유발시키는 이야기로써 스토리텔링이요, 기업의 판매 전략으로 광고문구인 카피요, 사회운동의 기치로서 슬로건이며 캐치프레즈가 된다.

문제는 같은 사실에 대해서 전제되는 말은 그것을 이해하는 생각의 틀을 형성해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집안에서 방범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울고 있는 영상’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있는 일상이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 방범창은 외부의 침입보다 밖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 안전망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영상을 보여주기 전에 의도적으로 “아이를 가둬 놓았다”라는 말이 전제된다. 이때 시청자 대부분은 자기도 모르게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갇혀있고, 가둬 놓은 어른은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 각인한다. 이 한 장면으로 의도된 악의적 편집은 사회고발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것은 필자가 언론사와의 재판에서 직접 다뤘던 사례이다. 이처럼 사람 소개에 있어 단어순서만 바꿔도 그 사람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길동 씨는 참으로 정직하고 고집이 세다’와 ‘길동 씨는 고집이 세고 참으로 정직하다’라고 했을 때 전자는 ‘정직하다’로 인식되고 후자는 ‘고집쟁이’로 인식된다. 정직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고집이 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길동 씨는 참으로 정직하고 소신이 뚜렷하다’라고 소개하면 어떨까?

인간은 말과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소통하며 서로 배우고 익힌다. 이때 말은 배운다는 쪽에 가깝고, 행동은 익힌다는 쪽에 치우쳐있다. 공동체가 소통하며 체득한 사건들이 시간을 두고 합의를 이뤄 말(글-文)로 정리(변화-化)돼 향유되는 것이 문화이다. 다시 말하면 말의 소통과 행동이 마치 자전거 타기를 몸에 익혀 평생을 함께하듯 삶 속에 완전히 배어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통되지 못하는 말과 행동은 문화가 아니다. 지역의 말인 사투리는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필자는 홍성에서 십수 년을 살면서도 고장의 말이 가지는 미묘한 감정을 읽어내는데 서툴다. 그래서 관심이 더하고 “알았슈”라는 답의 결과에 긴장한다. 예를 들면 개혀?(당신께 밥 한 끼 사겠다! 어떠냐? 개고기처럼 터부시되는 음식이라도 네가 그것을 원하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배려를 담고 있음), 혀!(응 알았어! 시간과 장소를 말해), 못혀!(고마워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미안해), 안혀!(난 너와 밥을 먹기 싫어) 이 수수께끼 같은 소통방식을 어느 날 친구 간에 “내가 언제 ‘못’현다 했지, ‘안’현다 했남”하고 다투는 통에 그 차이를 이해했다. 

홍성이 문화관광 도시로 성공하려면 먼저 ‘개혀?’처럼 고장의 문화(관광거리)에 대해 지역민들이 완전히 이해하고 몸에 익혔을 때 비로소 외지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다. 그래서 문화관광의 홍보는 먼저 지역민들에게 집중돼야 한다. 비근한 예로 지난 2007년 광천에 오기 전부터 정암사 소개에 오서산의 까마귀는 태양의 삼족오를 뜻한다고 썼다. 이후 몇 번 광천역과 등산로에 펼침막을 걸었으나 환경정비를 이유로 뜯겨졌고, 뜻있는 분들의 신문 기고가 이어졌어도 여전히 ‘까마귀 산’으로 불린다. 용봉산 역시 ‘용의 몸통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에서 요즘은 ‘산세가 운무 사이를 휘도는 용의 형상과 달빛을 감아올리는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는 여전히 와 닿지 않는 말로써 알려지고 있다. 이래서는 성공이 어렵다. 뿐만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들의 제목부터 전문가 외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외래어 투성이다. 이것은 우리 문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외국의 것을 베꼈다는 방증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불통의 사업으로써 성공이 어렵다. 관계 당국에 문제를 제기더니 세계화를 운운한다. 한국화 지방화도 성공 못 하는데 어찌 세계화를 이루겠는가? 

따라서 홍성군은 문화관광도시의 기초사업으로써 문화관광거리에 관심을 유발시키는 이야기(스토리텔링)들을 재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민들과 먼저 소통해 홍성화에 성공할 때 주민 모두가 어느새 홍보대사가 돼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범상스님 <석불사 주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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