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특집] 1945년 8월 15일 정오 민족의 해방, 한반도 운명 좌우한 38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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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특집] 1945년 8월 15일 정오 민족의 해방, 한반도 운명 좌우한 38도선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5.06.27 07:21
  • 호수 897호 (2025년 06월 26일)
  •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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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주년, 우리지역의 광복을 다시 읽다 〈1〉
1945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에 의해 한반도의 국토분단이 시작됐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연설은 우리 민족에게 광복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일제 강점기 35년의 식민통치가 끝장난 8·15 민족해방은 한민족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식민지였던 한반도가 일제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 해방됐음을 의미한다. 

8월 15일의 해방은 민족해방운동을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전개해온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민족의 의지에 기인하는 것이면서 연합국이 승리함으로써 이뤄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광복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한민족은 항일운동을 계속했고, 해외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무장독립군은 치열한 무력항쟁을 펴나갔다.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전개했던 항일독립투쟁은 국제적으로 우리의 독립의사를 확인시켜 주었고, 전후 처리를 위한 강대국 회담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은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선언에서 독립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며, 다음으로 1945년 2월 4~11일, 미·영·소가 얄타회담에서 전후의 세계문제 처리를 논의하고, 소련의 일본에 대한 참전 문제를 확정했다. 1945년 7월 26일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미·영·중의 3국 수뇌는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통보했으나, 일본 정부는 그 회답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 본토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이 투하되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게 됐고,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됐다. 조선의 해방은 연합국의 힘이 크게 작용한 불완전한 것이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만들어 자주적 민족국가를 세우려 했으나, 미 군정이 실시되면서 실패했다.
 

■ 신탁통치 반대, 민족적 공감대 형성
20세기 초, 조선의 마지막 국가였던 대한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해서 1910년 결정적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우리가 해방되던 날까지의 시대에 대해서만 고유하게 적용될 수 있는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사상과 운동을 포괄하는 관념이다. 

이와 같이 광복이라는 말은 논리적인 개념으로 정립되어온 어휘라기보다는 국권을 회복했다는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민족독립의식이며, 국권회복의식이며, 자주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반일독립운동은 엄밀하게 말해서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한 ‘강제병합’ 때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만 35년 동안 지속된 민족주의운동이다. 

이것은 다만 우리 민족이 앉아서 연합국 측으로부터 광복을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 반일독립운동의 내적 조건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1919년의 3·1운동이 민족독립운동으로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세력들을 포괄하는 통일된 조직체 없이 활동하던 국내외의 항일 세력들이 해방된 조국에 나타났다. 또한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준 직접적 원인이었던 연합군 가운데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민족 세력의 의지가 외세의 개입 앞에서 굴절되지 않을 수 없는 구도가 형성됐다. 

해방된 한반도는 일제의 직접적 지배로부터 해방이 있었을 뿐 친일파를 처리함으로써 일제 치하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 식민지 시대의 수탈 구조로부터 탈피함으로써 노동자·농민들에게 진정한 해방을 안겨주는 문제, 새로이 대두되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로부터 민족 자주성을 확립하는 문제 등의 어려운 과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민족 구성원 내의 계급적·파벌적 이익이나 외세의 의도와 결부돼 해방 시기 3년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미 군정은 친일파를 비롯한 우익세력을 지원해 남한을 반소·반공 군사기지로 삼으려 했다. 소련이 북한지역에 진주하자, 미국은 한반도의 가능한 부분만이라도 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자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으로 38도선을 소련에 제안했다. 미·소에 의해 획정된 38도선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됐고, 민족분단의 상징이 됐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8월 15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일반명령 제1호가 발표됐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에서는 미군, 북에서는 소련군이 일본의 무장해제를 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38선 분할에 대해 학계에서는 많은 논란과 연구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미 국무·전쟁·해군 3부 조정위원회(SWNCC)에서 근무하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 대령이 8월 10일 자정 무렵 30분 만에 선을 그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나중에 국무장관이 된 딘 러스크가 회고록에서 ‘자랑’하면서 드러났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38선을 미군의 영관급 장교 두 명이 30분 만에 획정했다는 사실은 38선이 미국의 ‘군사적 편의주의’에 의해 그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 국가의 운명을 이렇게 손쉽게 정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많은 ‘음모론’을 낳았다. 남한 우익진영과 미국 일부 언론이 제기한 얄타 밀약설, 1945년 7월 포츠담 밀약설, 일본이 38선 분할을 유도했다는 일본 음모설 등이 있다. 38선 분할은 미 육군부 작전국 전략정책단 헐 중장과 링컨 준장이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이 참여한 모스크바 3상 회의가 열렸고, 조선반도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과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방안이 결정됐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우익은 서로 대립했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과 민중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을 벌여 미군정에 맞섰다. 

광복 후 한반도의 정세는 기본적으로는 38선에 의한 국토분단과 이 문제 처리에 관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의 한국신탁통치안 결정에 따른 좌우익의 분열과 투쟁에서 규정됐다. 1945년 12월 28일 AP통신으로 전해진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모스크바 3상 회의의 협정은 한국에 대해서 미·영·소·중 4개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임시정부를 설립해서 장래의 독립에 대비하나, 그 신탁통치의 기간은 5년으로 하고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전 국민적인 반대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광복 후 3개월 동안 전개됐던 좌우 노선의 정당 간에 벌어졌던 갈등대립은 3상 회의 결정의 보도로 일시에 신탁통치에 반대하는데 민족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극복된 것으로 보였다. 그 이유는 ‘즉시적 독립’을 가장 큰 민족적 여망으로 생각해온 한민족의 의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같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 국내 정치, 반탁과 찬탁으로 양분돼
한국민주당에서부터 공산당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정당·사회단체들이 일제히 반탁을 표명하고 나섰다. 특히 공산당은 12월 28일 3상회의 결정의 뉴스가 나오자마자 반탁성명을 내고 그것도 부족해서 동맹 정당과 사회단체 15개 단체의 이름으로 공동성명까지 발표하면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1946년 1월 2일 찬탁으로 돌변했고, 1월 3일에는 공산당 주최의 서울시민대회를 열고 반탁대회인 줄 알고 참석한 공산당 동조세력 앞에서 찬탁을 천명하는 방법으로 찬탁노선을 제시했다. 물론 돌연한 노선변경은 평양에서부터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것을 계기로 국내 정계는 또다시 분열해 반탁진영과 찬탁진영으로 갈라지게 됐다. 

공산당이 돌연 찬탁으로 돌아선 것은 기본적으로 평양의 지령에 따른 것이었지만 국내 사정으로 보아서도 사실상 반탁동원에 있어서 우익 보수 세력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탁노선으로는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적었던 것이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이후 국내 정치 세계는 반탁과 찬탁으로 양분됐으나, 곧 그 분열은 국민들의 정치의식 속에서는 반탁은 민족주의적 태도로 정착되고, 찬탁은 국제세력 영합적인 반 민족주의적 태도라는 고정관념을 남기게 됐다. 그런 만큼 공산당 측에서는 반탁세력에 대해서 온갖 비방을 서슴치 않게 됐다. 실제로 1946년 1월 16일부터 서울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자 38선 문제와 임시정부 수립은 미·소 양국의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정치인이나 일반 국민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틈에서 공산당은 소련 대표의 주장에 장단을 맞추면서 우익반탁 세력을 미소공동위원회의 초청대상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반탁우익 세력의 봉쇄를 기도했다. 

이에 미국 측은 소련 측의 요구에 맞서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대립이 계속되다가 5월 6일 드디어 미소공동위원회는 유회되고 소련 측은 소련영사관과 더불어 철수하고 말았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됐으나 의견차를 좁힐 수 없어 결렬됐고, 반탁학생들의 시위와 ‘공위에 의한 정부는 괴뢰정부’라고 규탄한 배경도 있고 해서 10월 18일 무기 휴회에 들어간 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재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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