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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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 변승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5.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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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과 같은 집에 살지도 않았고, 같은 생활방식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어렸을 때 해주셨던 음식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 맛을 잊을 수 없고 그 어느 음식보다도 맛있다.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어머니 음식이 그립고 떠오를 때가 종종 있다. 

화장품 회사는 중·고등학생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을 널리 홍보한다. 실제로 성인들이 더 많이 구매하고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에게 홍보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어머니 음식과 같은 메커니즘이다. 즉, 어렸을 때 경험한 것이 기억에 오래 남고, 긍정적인 인식이 형성됐다면 성인이 돼 다시 그 브랜드를 재구매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람은 삶의 초기 경험이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이트가 태어나서 3년까지의 경험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주장을 한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긍정적이고 행복한 경험이 많았다면 삶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사람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받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가정, 학교, 친구, 직업에서의 문제, 각종 사고, 죽음을 포함한 상실 경험 등 살면서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다. 특히 어린 나이에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성인이 판단하는 것보다 더 크게 상처가 각인된다. 성인과 아이는 같은 경험을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학습이다. 학습이 일어났다는 것은 언제든지 꺼내서 활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학습적인 측면에서는 영어단어의 의미와 활용법을 어느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면 학습이 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보호자가 출근할 때 어린 자녀가 보호자의 신발을 깨끗이 닦았고, 그 모습이 대견해 500원을 줬다면 그 자녀는 다음날도 또 신발을 닦을 가능성이 있다. 보상에 의한 학습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어린 자녀가 신발을 닦고 보호자가 밝은 얼굴로 500원을 주면서 칭찬하는 것을 그 동생이 가까이서 지켜보았다면 동생도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간접적이지만 학습이 일어난다. 

보호자가 자녀들에게 부정적인 것을 경험하게 했다면 역시 그 일도 학습이 된다. 문제는 학습된 내용이 평생을 두고 자녀의 삶과 그 자녀의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업성취도가 높은 자녀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고, 낮은 자녀에게 반대로 했다면, 보호자의 양육태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성취도가 낮았던 자녀가 성인이 돼도 여전히 공부에 한이 맺혔을 것이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를 통해 해소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그 자녀가 대리만족을 시켜주지 못한다면, 어렸을 때 감추고 억눌렀던 감정까지 그 자녀에게 폭발한다. 자녀는 보호자가 왜 지나치게 화를 내는지 모를 것이고, 보호자는 공부 이외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의사소통이나 감정교류에도 무관심할 것이다. 자녀는 학업성취도가 자기 뜻대로 향상되지 않는 시기가 도래하고, 감정 해소를 못한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면, 일상에서 거친 모습을 보여주고 괴로움 해소를 위해 자신의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이해한다. 그렇지만 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청소년은 더욱 그렇다.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하며 나를 자극하는 청소년이 눈앞에 있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의 상태가 됐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빛이 진하면 진할수록 그림자가 짙은 것처럼, 아이가 거칠면 거칠수록 내가 모르는 혹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그 아이는 혼자 힘들게 견디며 다음 과정을 준비하는 중이다. 그림자를 안아주자.

변승기 <한국K-POP고등학교 교사·칼럼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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