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년전 홍주인구 6만 5365명, 현재 9만 6961명, 48% 증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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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년전 홍주인구 6만 5365명, 현재 9만 6961명, 48% 증가해
  • 한기원 기자
  • 승인 2023.05.2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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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당시 충청 최대 고을 충주, 2위 홍주(홍성), 청주, 공주 순
홍주(홍성)인구, 1789년 6만 5365명, 2023년 4월 말 9만 6961명
1789년 1만 2646세대, 2023년 3만 8320세대 2만 5674세대 증가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전문원은 ‘고지도와 지리지 속에 담긴 충청도 고을의 역사와 읍치(邑治) 조선 시대 지방 고을의 행정 중심 공간 이해’라는 제목의 논문 2편에서 조선 시대 고문헌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1789년 무렵 충청 54개 고을의 호구(戶口·집과 식구)수를 비교한 조사통계가 관심을 끈다.

이 통계의 정확도는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요즘으로 치면 통계청이 5년마다 발간하는 인구주택총조사(센서스)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789년 당시 충청도의 세대수와 인구수는 총 22만 1485가구에 인구는 86만 8204명(전국의 11.7%)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전국(오늘날 남북한 전체)은 175만 2837 가구에 총 740만 3606명이었다. 통계청이 조사한 지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남한 인구는 약 5163만 명, 북한 인구는 약 2560만 명이다. 남한의 인구가 북한의 인구에 비래 2배가량 많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남북한 인구를 합치면 총 7723만여 명이다. 2013년도와 비교하면 인구수는 소폭 늘었지만, 남한은 2021년 이후 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남북한을 합친 가장 최근의 정확한 인구 통계(2012년 말 기준)는 7443만1822명(남한 5000만4441명, 북한 2442만 7381명)이었다. 2022년 지표와 비교해 볼 때 2012년에 비해 남북한 전체 인구는 279만여 명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며, 남한은 162만여 명 늘었고, 북한도 117만여 명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충청 4개 시·도 인구는 523만 2105명으로 남북한 전체의 7.0%정도를 차지했다. 

결국 충청도 인구 비중은 1789년 당시 전국의 11.7%에서 223년 뒤인 2012년에는 7.0%로 4.7%p 낮아진 셈이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정조 시대 이후 약 2세기 동안 충청도의 정치, 경제적 위상은 계속 추락됐다는 뜻이다. 논문 2편에 실린 내용을 근거로 1789년 당시 충청 54개 고을(경기 평택 포함)의 인구 순위를 매기고, 이름도 현재의 행정구역에 맞게 해석했다. 

그 결과 1789년 당시 고을 별 인구는 △충주(8만 7331명) △홍주(현재의 홍성 5만 2761명+결성 1만 2604명=6만 5365명) △청주(4만7046명) △공주(4만 4438명) △진천(3만 294명) 순으로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와 달리 상위 5개 지역(고을)에 충북이 3곳 포함돼 대전·세종·충남(2곳)보다 더 많은 점이 특징적이다. 

당시 충청도 54고을 중 ‘북도’가 ‘남도’보다 도세가 컸다는 뜻이다. 현재 인구와 비교해 보면 대전, 평택, 천안 등 경부(서울~부산)축 주요 도시가 지난 200여 년간 다른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속히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1910~45년) 간선철도(경부·호남선) 부설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특히 경부·호남선 분기역이 있는 대전은 1789년 진잠과 회덕 고을을 합친 인구가 1만 5000여 명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약 100배인 154만여 명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평택은 5000여 명에서 44만 5000여 명으로 약 88배, 천안(목천+직산)은 3만여 명에서 60만여 명으로 19배 증가했다. 반면 1789년 당시 인구가 8만 7331명으로 충청 최대 도시(고을)였던 충주는 2014년 1월 1일 기준 주민등록 인구가 20만 8115명으로 220여 년간 겨우 1.4배 늘었다. 

충청에서 두 번째 도시(고을)였던 홍주(홍성)의 경우 1789년 당시 인구가 6만 5365명(1만 2646세대)으로 2014년 1월 1일 기준 8만 9704명(3만 8320세대)으로 220여 년간 2만 4339명 늘었다. 올해 4월 말 기준으로는 9만 6961명으로 234년간 3만 1596명 늘었다. 

결과적으로 234년간 48%의 인구가 늘었다는 통계다. 이마저도 지난 2006년 2월 충남도청 이전이 확정됨에 따라 대전에 있던 충남도청 등이 2012년 말부터 홍성으로 이전해오면서 신도시가 건설됨으로써 인구가 대거 유입된 영향으로 풀이되고 있다. 

충청에서 세 번째(3위)로 인구가 많았던 도시(고을)인 청주는 1789년 당시 4만 7046명에서 2012년 1월 1일 기준 67만 2904명으로 무려 62만 5858명이 늘어나 14배나 증가한 유일한 도시다.

조선 시대 충주, 청주, 홍주(홍성)와 함께 충청 4목(牧)으로 불린 공주는 당시 충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고을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조선 시대에 충청감영이 있던 행정중심지였으나 호남선 유치에 실패한 데다 1932년 충남도청을 대전에 빼앗기면서 도시 발전이 정체됐다. 그 결과 1789년 당시 인구가 4만 4438명에서 2012년 1월 기준 11만 5507명으로 1.6배 증가하는 데 그쳤다.

현재 충남도청을 비롯한 충남의 주요 행정기관은 공주, 대전을 거쳐 홍주(홍성)로 옮겨와 충남도청 내포신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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