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정치와 ‘네체시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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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정치와 ‘네체시타’ 읽기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10.12 16: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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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들이 말쑥한 정장과 점퍼차림으로, 때로는 앞치마를 두르고 TV화면에 등장한다. 정치인들이 외모에 신경 쓰며 이벤트성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좋은 이미지가 표와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연예인들이 전속코디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대선 후보들도 머리스타일과 와이셔츠, 재킷의 색상까지도 코디의 철저한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른다.

196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존 F.케네디는 신선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한 케이스다. TV가 라디오를 대체하던 시기에 케네디는 TV라는 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TV토론을 선거 전략에 적극 활용했다. 그는 TV토론에 임하면서 재킷의 모양이나 와이셔츠의 색상, 심지어 양말까지도 코디의 도움을 받았다. TV토론에 임하여서는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TV카메라 앞에서 리허설을 하기도 했다. 반면 공화당 후보였던 닉슨은 TV토론에 임하는 자세가 케네디와는 사뭇 달랐다. 당시에 부통령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TV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닉슨은 TV토론 제작회의나 리허설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스튜디오 조명등 아래 앉아야 한다는 보좌진들의 조언도 무시했다. TV토론이 시작되자 젊고 참신한 이미지의 케네디는 묻는 질문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부강한 미국건설을 호소했고, 늙고 지쳐 보이는 닉슨은 낮선 카메라 앞에서 두리번거리며 세부공약을 발표하는 수준에 그쳤다. 미 국민의 3분1이 지켜보는 TV토론에서 이미 대선의 결과는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결과는 닉슨의 패배였다.

그러나 아무리 비쥬얼 시대라 하더라도 가상의 이미지가 정치의 요체일 수는 없다. 케네디가 참신한 이미지로 대중의 환호 속에 등장했지만 강력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시대의 ‘네체시타(시대정신, 시대의 필요성)’를 읽어내는 눈 밝음에 있다. 1960년대 미국은 전통적인 미국적 가치관의 거부, 정치지도자와 정부에 대한 불신, 기존관습에 대한 반항과 자유분방함이 분출하는 커다란 전환의 시기였고, 케네디는 이 네체시타의 어깨위에 올라타, 미국의 꿈과 이상을 국민에게 제시했다. 마키야벨리는 누군가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행운(fortuna 포르투나)과 힘(virtu 비루트) 그리고 시대정신을 알아내는 것(necessita 네체시타)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개인적 운이 좋아도, 정치적 힘이 있어도 네체시타를 알아내지 못하면 진정한 번영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마키야벨리의 주장이다. 민주화의 열기가 솟구치던 시대에는 민주화의 투사가 그 시대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절대적, 상대적 빈곤 속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다. 이 시대의 네체시타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통한 행복하기가 아닌가 싶다.

내가 어렸을 때 어느 대통령 후보자의 선거구호는 ‘배고파 못 살겠다 죽기 전에 살길 찾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는 생존에도 힘겨웠던 시기였고 노력하여 잘 살아보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삼성’이라는 브랜드가치가 세계 9위에 올라있고 가수 싸이가 미국 뉴욕의 한복판에서 말춤을 추고, 영화 ‘피에타’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일부의 절대적 빈곤과, 폭넓은 상대적 빈곤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절반 이상이 ‘아르바이트’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민은 열심히 벌어보았자 은행 빚 갚기도 힘든 현실이다. 영화 ‘피에타’의 이야기처럼 돈 없으면 몸의 일부라도 훼손하여 보험금이라도 타내야 하는 절망 속의 사람들이 많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이 양극화된 채 돈의 주종관계로 사회가 굴러간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해소해 보자는 것이 복지, 경제민주화 같은 애매한 단어들이다. 그러나 대선 후보들의 정책 속에 빈부 격차에 대한 구체적 액션플랜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런 말들은 선거용 구호로 그칠 공산이 크다. 누군가는 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위하여 ‘토지개혁’이상의 조치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회의 정치적 불만은 늘 경제문제로부터 출발한다. 곡간이 차야 인심이 나듯, 경제적 어려움이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사회적 불만이 사라진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근본적인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기업 CEO의 사명은 조직의 ‘생존과 번영’에 있다. 대선 후보들이 부강한 국가건설을 위한 참신한 정책을 내놓고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정책이 국가와 개인의 발전에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문, 안 세 후보가 내 놓는 정책들은 대동소이하고, 구체적 플랜이 없어 표를 구걸하기 위한 정책처럼 보이기 쉽다. 이것은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이거나 경제적 양극화 해소를 위한 대안이 없다는 증거다. 한 개인의 힘으로 복잡한 정치 경제의 현안문제를 풀어내기란 지난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은 남다른 성찰과 통찰로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대한 로드맵을 내놓아야 한다.

대선후보들의 많은 정책들이 경제문제로 수렴되고 있지만, 대중들이 정치인에게 열광할 수 있는 것은 경제문제 너머에 있는 삶의 비전과 꿈, 이상인지 모른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경제적 풍요로움을 바라는 것은 경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한 질 높은 삶의 향유에 있다. 어떠한 삶이 질 높은 삶인지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동의할 수 있는 삶의 비전, 꿈, 이상을 대권 후보들이 제시할 때, 또 그들이 살아온 이력 속에 그것이 짙게 배어 있을 때 그들의 카리스마로 작용될 수 있다. 막스 베버도 물질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데에 카리스마의 특징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추상적 목표가 경제적 현안문제보다 정치적 열정을 일으키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대선 후보들이 비쥬얼 시대에 멋지게 차려입고 이벤트성 행사에 참여하여 대중의 표를 구걸할 수도 있겠지만, 속 깊은 대중들은 이 시대의 정확한 네체시타를 읽어내고,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로 대중을 선도하는 대선후보를 보고 싶어 한다. ‘스마트’한 시대라도 ‘아날로그’적 정서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비합리적 감정에 의하여 투표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홍주일보·홍주신문 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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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두영 2012-10-15 08:56:36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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