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 정체성’ 담긴 천혜의 보물, 용봉산 ‘청송사 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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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정체성’ 담긴 천혜의 보물, 용봉산 ‘청송사 미륵불’
  • 취재·사진=한관우·한기원·김경미·최진솔 기자, 협조=홍주일보·홍주신문 마을기자단
  • 승인 2023.10.2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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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신도시 주변마을 문화유산 〈8〉
보우국사의 사리탑을 모신 기록이 있는 용봉산 청송사의 상하리미륵불.
  • 청송사 상하리미륵불(충남유형문화재 제87호)


99암자 전설 깃든 불교의 보고 ‘용봉산’ 

홍성군 홍북읍에 위치하고 있는 용봉산(龍鳳山; 해발 381m)은 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암괴석이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해서 ‘충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산이다. 이 산은 ‘산세가 구름과 안개 사이를 주름잡는 용(龍)의 형상과 같고, 달빛을 감아올리는 봉황(鳳凰)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용봉산(龍鳳山)’이라 불리게 됐다고 전해진다. 한편 예전에는 8개의 산봉우리로 형색을 갖췄다고 해서 ‘팔봉산(八峰山)’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용봉산은 홍성군 홍북읍과 예산군 삽교읍·덕산면에 걸쳐 솟아 있으며,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충남의 대표적인 명산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99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민간의 전언처럼 산줄기마다 많은 불교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용봉사를 비롯해 용봉산 주변에는 그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 여러 절터가 남아있어 용봉산이 오랜 옛날부터 홍주(홍성)뿐만 아니라 넓게는 내포지역의 불교 중심지로 기능을 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시대 용봉산의 명칭은 ‘팔봉산(八峯山)’이었고, 용봉사(龍鳳寺)와 청송사(靑松寺), 영봉사(靈奉寺), 수암사(秀岩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용봉사와 수암만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를 기점으로 팔봉산 에 존재했던 여러 절들이 폐사되고 용봉사와 수암만이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이 수암의 위치를 알 수 없어서 기록에 남아있는 사찰 중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용봉사’와 최근 복원 불사를 추진하고 있는 ‘청송사’가 유일하다. ‘청송사’는 지금까지 ‘용도사’와 ‘석불사’ 등으로 불려왔으나 올해부터 복원 불사를 위해 본래의 사찰 이름을 찾아 ‘청송사(靑松寺)’로 바르게 고쳤다.

용봉산(龍鳳山)은 홍성군 홍북읍과 예산군 삽교읍·덕산면에 걸쳐있으며, 예산 땅에 있는 수암산(秀岩山)까지 이어져 있다. 고도는 높지 않지만 기암괴석이 많은 바위산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해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고 있는 산이다. 더욱이 산행을 포행(布行) 하듯이 하면 마음이 청정해지고 산의 정기(精氣)를 온몸으로 받을 수 있는 영묘(靈妙)한 산으로 꼽히고 있다.
 

■ 상하리미륵불, 우리나라 3대 미륵불 평가
홍북읍 상하리 용봉산에는 거대한 미륵불이 있다. 높이 8m,어깨너비 4m의 거대한 ‘상하리미륵보살입상’은 하관이 넓적한 데다가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게 ‘은진미륵’과 같은 계통인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87호 ‘홍성 상하리미륵불’이다. 1979년 문화재로 지정됐다. 고려 중기에 세워진 불상으로 우리나라 3대 미륵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는 국내 유일의 형태다.

광배에 해당되는 모암(母巖)을 뒤에 둔 명당이라는 자연입지 조건과 돌을 겹쳐 올리지 않고 하나의 자연석에 조성된 국내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지 않는 소박미는 고려인의 미소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는 미륵불이다.

이 미륵불은 용봉산 서쪽 기슭의 절벽 밑 자연석 화강암을 그대로 활용해 만든 불상으로 전체높이가 8m에 달하고 어깨너비가 4m에 이른다. 이 미륵불은 소발의 머리에 윗면은 평평해 육계를 생략했고, 눈은 가늘고 길게 표현했다. 귀는 직선으로 턱 밑까지 내려왔고, 넓적하고 낮은 코, 작은 입은 비교적 얕게 평면적으로 돋을새김한 엷고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어 자비로움을 잘 표현했다. 삼도는 분명하지 않고 어깨는 경직되게 표현했다. 얼굴에 비해서 신체는 양감이 없으며, 광배(光背; 불상의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뒤에 빛을 나타낸 문양)나 신광(身光;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나오는 빛), 대좌(臺座;불상을 안치하는 대), 손과 통면의 법의, 팔등에 걸친 습의 외에는 대부분 생략됐다. 왼팔을 가슴 위로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시무외인 수인(手印)을 짓고 있다.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착의한 옷 주름이 간략하게 묘사됐다는 것과 하단부가 지면에 묻히면서 생략되고 배면에는 꾸밈없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고려 초의 부처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양감(量感)이 희미해지는 게 흠이다. 불심이 깊던 고려 시대 홍주 사람들은 전란 등 온갖 삶의 고비에 부닥칠 때마다 10여 리가량 떨어진 이 용봉산 봉우리의 마애불을 향해 삶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십사 기도했을는지 모를 일이다. 국보 제323호인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7호인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 충청도의 국가문화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유사한 지방색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특히 향토적인 면을 잘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하리미륵불에 대한 평가는 전체적으로 후덕한 상호와 얼굴이 얕게 부조돼 평면적이라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아 불완전하게 보인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조선 시대의 불상과 비교해서 나오는 평으로 편협적인 것이 아닐까. 특히 지방의 고려 시대 석불들은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것과 중심지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당장 국보 제323호인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역시 몇 번의 국보 승격 논의가 있었고, 2018년이 돼서야 국보로 인정받았다. 이런 점을 고쳐 나가면서 지방에 있는 고려 시대 불상들을 더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고 평가하는 대목이다. 홍성 상하리미륵불은 자연 그대로의 돌을 이용해 조각했으며, 용봉산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다.

충청도의 지방색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지금도 용봉산(팔봉산)을 지키고 있는 미륵불이다. 고려 시대 지방소재라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 문화재계는 편견을 타파하고 올바른 시각에서 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불상들을 제대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홍성 상하리미륵불 앞에 있는 ‘너럭바위’라고 불리고 있는 ‘만물바위’ 안내판에는 “도솔천에 머물고 계시는 자씨(慈氏) 미륵은 시간상으로는 56억 7000만년 뒤에 사바세계에 오시지만 중생을 향한 대자비심은 지금 현재에도 자줏빛 광명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계신다. ‘삼신바위’와 ‘미륵불’과 일직선에 나란히 하고 있는 ‘너럭바위’의 울퉁불퉁한 변화는 마치 산, 들판, 호수, 계곡 등 만물의 형상을 담고 있어 ‘만불바위’라 불린다. ‘만불바위’ 위로 비치는 ‘미륵불’의 광명은 모든 중생의 업을 소멸시킨다”고 쓰고 있다.

자연 암석을 활용해 조각한 입상(立像)인 ‘홍성 상하리미륵불(上下里彌勒佛·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87호)’은 먼 훗날 이 땅에 출현해 중생을 제도하는 미래의 부처인 것이다. 
 

■ 청송사, 보우국사 사리탑 모신 곳 기록
‘상하리미륵불’의 역사성이라면 홍주(洪州; 홍성)의 정체성은 태고 보우국사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선종인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태고 보우국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태고를 중흥조로 칭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홍주(洪州) 출신으로 홍주(홍성)의 지역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인물 중에 불교계는 세 분의 큰 스님들이 있다. 한 분은 고려 시대 태고 보우(太古 普愚,1301~1382)국사이고, 다른 한 분은 근세 수월 음관(1855~1928) 스님이며, 또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이다.

태고(太古)는 호(號), 보우(普愚)는 휘(諱)이고, 법명은 보허(普虛)다. 태고 보우국사는 1301년(고려 충렬왕 27) 9월 21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리병부사(判吏兵部事) 홍양공(洪陽公)에 추증(追贈)됐던 홍주(洪州) 홍씨(洪氏) 연(延)을 아버지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정(鄭)씨를 어머니로 태어났다. 해가 품 안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그를 얻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기골이 준수해 법왕아(法王兒)라 불렸다. 태고 보우국사는 1700년 한국불교를 잇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로, 고려말 구산선문 선종 불교의 통합을 도모한 큰 스님이다. 태고 보우국사는 13세에 출가해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했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뒤, 선(禪) 수행에 몰두했다. 1356(공민왕 5) 왕사(王師)로 책봉됐고, 1371년 국사가 됐다. 1356년 고려 공민왕 5년에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해 조선 시대까지 충청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목사고을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태고 보우국사의 공이 컸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태고 보우국사는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해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 공민왕에게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는 등 불교계의 통합과 정계(政界)의 혁신을 도모했던 인물이다.

1301년 홍주(洪州)에서 태어나 13세에 양주 회암사 광지(廣智)의 제자가 됐고, 1341년 북한산 중흥사 주지를 지냈으며, 동쪽 언덕에 암자를 짓고 자신의 수도처로 삼았다. 중흥사의 사격이 왕성했을 때 이곳을 동암(東庵)이라 불렀다. 이후 태고 보우국사가 머물며 수행했다고 해서 ‘태고암(太古庵)’으로 불린다. 이곳에서 5년을 지내는 동안 중국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본떠서 장문의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총 82구로 내용이 절절하고 정서가 깊다. 이후 자신을 ‘태고(太古)’라 불렀다고 한다. 

홍주(洪州)와 태고(太古) 보우국사의 관계는 홍주홍씨(洪州洪氏)로 홍주(洪州)에서 태어났고, 왕사(王師)로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하는데 공을 세운 것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의 홍성에는 보우국사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관련한 유물은 없다. 하지만 유창이 쓴 ‘태고행장’에 따르면 보우국사의 사리탑을 네 곳(양산사와 사나사, 청송사, 태고암)에 모셨는데, 그중 한곳이 예전의 홍주(洪州) ‘팔봉산(八峯山)’의 ‘청송사(靑松寺)’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용봉산 ‘청송사’가 그곳이다. 청송사 가람 배치의 양식에서 볼 때 미륵불을 모셨던 사지(寺址)에서 출토된 ‘왕자명(王字名)’ 기와는 보우국사의 사리탑을 모셨다는 ‘청송사’를 확정지어 주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럭바위’라 불리는 ‘만물바위’.
‘너럭바위’라 불리는 ‘만물바위’.

<이 기사는 충청남도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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