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운동의 산실 춘천, ‘의병마을’과 ‘청소년의병수련관’
상태바
의병운동의 산실 춘천, ‘의병마을’과 ‘청소년의병수련관’
  • 취재·사진=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3.10.21 08: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11〉
춘천시 남면 춘천의병마을의 의암기념관(춘천의병기념관).
춘천시 남면 춘천의병마을의 의암기념관(춘천의병기념관).

춘천 남면 유인석 의병장, 강원·충청·경상 3도의 의병운동 중심이 돼
 고종 퇴위, 춘천 유홍석 의병장·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서울 진공’
춘천 남면 가정리 의병마을, 의병항쟁을 통한 항일정신이 숨 쉬는 곳
 봉화산 아래 8만 6000여㎡에 펼쳐진 ‘춘천의병마을·청소년의병수련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유림들은 이를 망국으로 보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전기 의병운동은 1896년 1월 춘천 남면 이소응 의병장의 친일 관찰사 처단으로 시작돼, 원주 이춘영, 강릉 관동창의대장 민용호 의병장의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다. 이 무렵 충북 제천에서 기병한 춘천 남면 유인석 의병장은 강원·충청·경상 등 3도에 걸쳐 중동부 일대를 장악해 의병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후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13도 의군도 총재가 돼 국내외 의병운동을 이끌었다. 중기 의병운동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영월 원용석, 원주 원용필, 홍천 박장호, 양구 최도환, 삼척 최하규 의병장이 활약했다. 1907년 고종황제의 퇴위 후 일어난 후기 의병운동은 춘천의 유홍석 의병장과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춘천 서면 지용기, 원주의 민긍호, 13도 창의대장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감행했던 이인영, 이춘영 의병장이 활약했다. 그동안의 의병운동을 이어받은 3·1만세운동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독립운동으로 세계사적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일제가 한반도 침탈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1895년은 조선에 있어 치욕스러운 해였다. 일본 자객과 낭인이 황제가 거처하는 경복궁에 난입해 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이에 당황한 고종은 황급히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절박하고 기막힌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고종은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굴복해 상투를 강제로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리고, 고종 스스로 서양 옷을 입고 상투를 자른 채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굴욕의 중심에 섰다. 

일제가 황제와 조정을 능멸하며 조선을 점령해 들어올 때, 춘천 출신의 걸출한 유학자 가운데 십수 명의 의병장이 나와 무명의 의병과 함께 항일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들 중 의암 류인석은 강원과 충청지역을 거점으로 전국 대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했다. 습재 이소응 또한 춘천 중심의 영서 일대를 거점으로 춘천 의병장에 등단해 의병투쟁의 선봉에 섰다. 습재 이소응은 봉의산에 올라 의병을 일으킨 까닭을 하늘에 고하는 제를 지낸 후, 머리를 깎고 춘천으로 부임하는 친일 관찰사를 죽림동 개못(犬淵:晴淵)에서 처단해 의병의 기개를 전국에 떨쳐 의병 봉기를 선도했다. 최초 여성 의병장 윤희순 또한 춘천에서 독립투쟁을 시작해 전무후무한 삼대에 걸친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던 주인공이다. 

의암 류인석은 1898년 집안현 팔왕동에 최초로 해외 의병 기지를 건설했고,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1910년엔 대한13도의군 도총재에 추대돼 의병 총대장에 올랐다. 백범 김구와 안중근 의사는 의암 류인석과 동문수학한 고석로(高錫魯)의 제자로 의암과 학맥으로 잇닿아 있으면서도 동지(同志)로 항일 독립투쟁에 함께했다.


■ 춘천의병, 5000∼6000명의 다양한 집단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노골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복령과 을미사변, 단발령 등을 계기로 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강원도 춘천에서도 1896년 1월 18일 의병이 일어나 춘천 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하고 서울 진공을 도모하는 등 2월 8일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할 때까지 20일 동안 활동했다.

1894년 청일전쟁 후 근대화의 미명 아래 갑오경장이 시행되면서 일제의 국권침탈 야욕이 노골화되자 전국적으로 반일감정이 크게 고조됐다. 특히 1895년에 들어와 전통 의복제도를 양복으로 고치게 한 변복령,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 상투를 자르게 한 단발령 등 충격적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1896년 1월 춘천을 비롯해 강릉, 제천, 홍주(홍성), 안동, 진주, 나주 등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1월 1일(음 11월 17일) 단발령이 시행되자, 춘천지방의 민심도 크게 격동했다. 선비 정인회(鄭寅會)를 주축으로 군인 성익현(成益賢), 상민 박현성(朴玄成), 유생 홍시영(洪時永) 등이 춘천부민(春川府民)을 모아 1월 18일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은 관아를 점거해 본영으로 삼고, 민두호(閔斗鎬)의 생사당(生祠堂)을 불태우고, 그 아들 민영준(閔泳駿)의 집에 난입해 집기를 부쉈다. 5000∼6000명의 춘천 의병은 전직 관료와 재야 유생을 비롯해 아전, 구식군인, 포군, 보부상, 농민, 상인 등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됐다.

봉기 2일 후인 1월 20일에는 화서 이항로의 문인으로 덕망이 있던 이소응(李昭應; 1852∼ 1930)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의병장 이소응은 일제 침략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그 본거지인 서울 진공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부호들에게 군량미를 갹출하고, 관찰부의 공금을 전용해 군자금에 충당했고, 군기고를 열어 무기를 확보했다. 그리고 ‘춘천의병장’ 명의로 강원, 경기, 관북 일대에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킨 목적과 정당성을 천명하고 민중의 참여와 원조를 독려했다. 1월 28일, 신임 관찰사로 부임하던 조인승(曺寅承)을 처단한 뒤 그의 머리를 홍문(紅門) 위에 매달았다. 이어 서울 진격을 위해 춘천을 떠나 가평에 이르렀을 때, 서울에서 급파된 경군(京軍) 친위대를 만나 2월 3일 가평의 앞산인 벌업산(寶納山)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해 춘천으로 회군, 약사현(藥司峴) 부근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수세에 몰린 전황를 만회하고자 의병장 이소응은 의진의 통수권을 종형 이진응(李晉應)에게 맡기고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 원병을 청했으나 실패했다. 그 사이 춘천으로 진군한 경군이 2월 8일 총공격을 가하게 되자 결국 패산하고 말았다. 그때 의병장 이진응은 우물에 투신 자결했다.

이렇듯 춘천 의병은 1896년 을미의병 시기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대표적인 의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기 함께 봉기한 강릉의병, 제천의병과 활동 과정에서 상호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양구, 금성, 회양 등지 뿐만 아니라 안변 등 관북지방에 이르기까지 의병 활동 파급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춘천 의병마을에 있는 청소년의병기념관.

■ 의병항쟁 통한 항일정신 숨 쉬는 곳
현재 춘천 남면 가정리 마을은 300여 명의 주민에 불과하지만 110여 년 전만 해도 거대한 항일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곳이다.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대학자로 성장, 구국 항일 사상을 펼친 의병장 의암 유인석의 고향이자, 의암과 제종 형제 사이인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인 유제원과 결혼, 시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의병운동에 나선 윤희순이 구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활동한 곳이기도 하다. 구한말 위정척사 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화서학파의 본거지로 의병 항쟁을 통한 항일정신이 숨 쉬는 대표적인 충의마을로 꼽힌다.

이곳 가정리에는 ‘의병마을’과 ‘청소년의병수련관’이 조성돼 있다. 지난 2009년 춘천시는 전국적인 청소년 충의(忠義) 체험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국비 등 14억 원을 들여 의암 유인석 유적지 내에 ‘청소년의병수련관’을 건립했다. 전시와 교육 기능을 갖춘 수련 시설 1동과 숙소 2동 등 연면적 360㎡ 규모의 전통 한식 건물이다. 야외 강연장과 의병훈련장 등의 기존 시설도 다양한 체험활동이 가능하며, 춘천의병마을의 시설과 프로그램 등을 연계해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의암의 사상과 업적을 선양하기 위한 학회와 기념사업회가 설립돼 의암제를 비롯해 매년 다채로운 행사가 이곳 가정리 의병마을에서 열리고 있다고 전한다. 의암 유인석의 유적지와 전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의병마을’을 지나면 의암의 어록과 연대기가 새겨져 있는 돌담길이다. 전체 8만 6000여㎡에 펼쳐진 유적지가 봉화산 줄기 아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마을의 돌담에 새겨진 ‘격고 팔도열읍(檄告 八道列邑)’은 유인석이 ‘아무리 어렵고 위태한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가는 나라와 천하의 도의를 다시 일으켜 하늘의 태양이 다시 밝도록 해야 한다’고 쓴 의병격문이다.

의암의 묘가 있는 마을 뒷산 너머에는 여성 의병장 윤희순 등이 당시 무기제조와 의병훈련을 했던 가정리, 일명 여의내골 터에는 기념비만이 외롭게 당시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살아생전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둔 의암의 호국충절의 얼이 살아있는 마을 가정리에서 10여 분 거리 떨어진 이웃 마을 발산리에는 또 하나의 항일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130여 년 된 느티나무 옆에 자리한 비석의 주인공은 윤희순 의병장. 최초의 여성 항일의병장으로 직접 지어서 의병 활동을 독려했다는 ‘안사람 의병가’가 새겨진 비석이다. 평범한 시골 아낙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온 가족이 중국으로 이주, 평생 항일투사로 살았던 한 여인의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의암 유인석 의병장의 묘가 있는 춘천의병마을 전경.
의암 유인석 의병장의 묘가 있는 춘천의병마을 전경.
의암 유인석 의병장의 묘역.
의암 유인석 의병장의 묘역.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