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청운대학교 영미문화학과 교수
칼럼·독자위원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축적돼있다. 깊게 파진 주름과 쭈글쭈글해진 피부에는 힘들고 어려웠던 삶의 역경이 녹아있다. 우리나라 1세대 사진가라 할 수 있는 최민식은 이런 사람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의 사진은 ‘195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근대화가 흘려 버린, 혹은 강제로 발전의 뒤안길로 차 내던져 버린 빈민계급에 대한 증언’이라고 이미지 평론가 이영준은 말한다. 왜 그런 부류의 사진을 주로 찍느냐는 비난과 억압에도 그는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일상에 카메라의 앵글을 맞췄다. 그의 사진집 ‘휴먼 선집 HUMAN 1~14’은 그의 이런 휴머니즘을 잘 보여준다.
살아온 삶의 여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얼굴은 사진의 좋은 소재가 된다. 지난겨울 어느 사진작가가 노인들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한다기에 잠시 동행해 본 일이 있다. 그가 이러한 일을 하는 의도는 장례식장의 사진들이 무표정해 보이거나 슬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은 살아생전에 스스로 영정사진을 만들어 놓기도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개는 자손들이 영정사진을 급히 만들었다. 영정사진을 미리 만들어 놓기가 썩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찍어 준 사진이 마지막 가는 길을 기쁘게 해준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있겠는가. 영정사진은 한 사람의 삶의 여정이 녹아있는 사진이 될 수 있기에 인물사진의 미학으로 승화될 수 있다.
사람들은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부터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놓고 싶어 했다. 영국의 귀족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남겼다. 영국 런던에는 이들의 초상화를 모아 놓은 국립 초상화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가 있다. 이곳에 들렀을 때, 필자의 눈에는 헨리 8세의 초상화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초상화가 빼어난 걸작이라기보다는 절대군주로서의 삶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그의 초상화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유토피아》라는 소설을 썼던 토마스 모어, 그와 결혼을 했던 6명의 여성은 참수되거나 비운을 맞았다.
헨리 8세뿐 아니라 힘 있는 귀족들은 자신의 파워플한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죠수아 레이놀즈, 토머스 케인즈버러, 조지 롬니 등 18세기 영국 초상화의 대가들은 귀족과 부자들 초상화를 그려 부자가 됐다. 풍경화를 그리는 것보다는 귀족들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이 쉽게 돈 버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산업혁명으로 재물을 축적한 신흥 부자들도 귀족들 뒤를 이어 초상화를 남겼다.
자신의 모습을 남겨 두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 욕망이라면, 지금이 최적기다. 돈도 들이지 않고 매일매일 셀피(selfie)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 일이 돈 들어가는 일이 아니니 요즘 만족스러울 때까지 셀피를 찍는다. 이러한 셀피의 원조는 프랑스에서 다게르와 동시에 사진을 발명했던 이폴리트 바야르다. 사진 발명에 따른 모든 명예와 부를 다게르에게 넘겨줘야 했던 그녀는 분통함을 억누를 수 없어 슬픈 마음으로 셀피를 찍었다. 사진의 발명에 따른 부와 명예를 다게르에게 빼앗겼으니 자신의 목숨은 죽은 목숨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은 죽은 목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리의 시체공치소에 가서 자신의 죽은듯한 모습을 자신이 직접 연출하여 사진을 남겨 놓았으니 최초의 셀피라 할만하다.
억울함을 호소했던 바야르와는 달리, 사람들은 ‘프사’에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남겨 놓는다. 가장 예쁜 자신의 얼굴, 몸매 등 기념할만한 행복한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겨 놓는데 이것은 영국의 가족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남기고 싶은 게 인간 욕망의 DNA다.
그러나 요즘 무덤덤한, 무표정한 얼굴을 찍는 사진작가들도 있다. 토마스 루프가 그런 사진을 찍는 독일의 대표적인 사진작가다. 사진은 사물의 겉면만 포착할 뿐 인간의 내면을 반영할 수 없어 드라이한 표정을 찍는다고 한다. 여권, 주민등록 사진과 같은 무표정한 사람들의 사진을 그는 작품으로 남겨 놓았다. 국내 사진작가 이하늘의 ‘스트레인저스’와 ‘부머스’에는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만 등장한다. 무표정한 아저씨와 아가씨들의 모습은 경직되고, ‘번 아웃’된 모습을 연상시킬 수 있다. 연출된 얼굴 모습이 60~70년대의 얼굴을 닮아있다. 그 사진을 보다가 추억 속의 사람들이 떠올라 오랜만에 흑백 사진이 가득 담긴 오래된 가족 사진첩을 꺼내 보았다. 정면을 응시한 머그샷 같은 어머니, 아버지, 친척들 흑백 사진이 들어있다. 무표정한 모습, 그 모습에 나도 있다.
사진의 근본 속성은 있는 것을 그대로 모사하는 ‘미메시스’에 있다. 포토샵이 발전하여 사진 보정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사진은 미메시스의 개념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 안에서도 개인이 살아온 삶의 여정이 꿈틀거릴 수 있다. 영정사진에서도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역사가 살아 숨 쉴 수 있다. 영정사진 갤러리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멋진 영정사진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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