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정통 성리학자 남당 한원진 선생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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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정통 성리학자 남당 한원진 선생의 생애와 업적
  • 신상구 충청문화역사 연구소장
  • 승인 2013.02.0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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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청운대학교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남당학연구소'를 개설하여 유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남당 한원진은 호서학파인 율곡 이이-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우암 송시열-수암 권상하로 이어지는 정통 성리학을 충실히 계승·발전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 노론의 대유학자로 외암 이간과 '호락논쟁(湖洛論爭)'을 벌려 조선 유학사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한말 위정척사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홍주의병을 비롯한 항일의병운동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특히 그의 사상은 한말 의병장인 지산 김복한과 복암 이설을 비롯 항일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만해 한용운 선사와 백야 김좌진 장군 등 홍성 출신의 수많은 충절위인들의 정신적 배경이 되면서 홍성지역의 사상적 뿌리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남당학연구소 개설은 호서지역 정통 성리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가 아주 크다고 볼 수 있다.

남당 한원진 선생은 1682년 충남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 출생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경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유기이며, 어머니는 함양 박씨로 숭부의 딸이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성만징) 중 한 사람이다. 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천거되어 영릉참봉이 되었고, 1721년(경종 1) 부수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며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의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 (臣視君如仇讐)'는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의 구명운동으로 복직되어 장령·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았으며,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 율려·천문·지리·병가·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평생 학문의 목표를 수사문설(守師門說)에 두고 스승의 학설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이나 비판의 여지없이 절대 정당한 것으로 따랐다. 실제로 그는 송시열의 학문과 실천을 계승하기 위해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문제를 집중 연구했다. 이와 기의 부잡불리(不雜不離), 무선후성(無先後性)과 이에 입각한 인(人)과 물(物)의 차별상을 의리론(義理論)의 범주에서 해석함으로써 주자-장재-서경덕-이율곡-김장생-송시열-권상하-강문팔학사로 이어지는 도통연원(道統淵源)의 체계를 확정지으려 했다. 1751에 타계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충남 홍성군 서부면 양곡리 174에 안장되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순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발전하면서 인성과 물성에 대한 동질 여부에 대하여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 논쟁은 권상하의 문하인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며, 인간과 동물 혹은 식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하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근본적으로 서로의 본성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으로 나뉘었다.

인물성동론의 대표 주자는 이간이고, 인물성이론의 대표 주자는 한원진이다.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는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서울 지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낙학은 낙론이라 하였고, 인물성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충청도지방에 살고 있어 호학 또는 호론이라고 칭하였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 벌어진 인물성동이론의 논쟁을 호락논쟁이라고 한다. 호락논쟁의 쟁점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同異)와 미발심체(未發心體)의 선악 두 가지로 집약된다.

호락논쟁은 현실 사회의 실용적인 논쟁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인성과 물성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룸으로써 인간의 주체성과 도덕의식을 함양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리고 호락논쟁은 18세기 초 수도권과 충청권 지식인 사회를 뜨겁게 달구면서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는 바람에 16세기에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사이에 격렬하게 벌어졌던 사단칠정론과 함께 조선 성리학계의 최대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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