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후 2시 홍성군노인복지관의 요리강좌 '달콤한 교실'에서 만난 권명오(69·홍성읍 오관리·사진) 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복영양밥을 만들고 있었다. 요즘엔 요리하는 남자가 흠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주목받는 세상이라지만 70세에 가까운 할아버지가 어설픈 솜씨로 요리하는 모습은 어쩐지 낯설고 때론 신선했다.

33년간 철도청에서 근무하다 2001년 퇴직한 권 씨는 직장을 다닐 때만해도 요리는 커녕 설거지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아내 신정섭(64) 씨가 6년 전 심하게 아프면서 아내를 위해 앞치마를 두르게 됐다는 게 권 씨의 설명이다. "병명도 제대로 모른 채 아내가 시름시름 앓았어요. 살이 10kg이나 빠지면서 일어나지도,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 됐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갱년기 우울증이 심하게 온 탓이었어요. 아내가 아프니 어쩔 수 없이 손수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죠. 그러다 이왕 아내에게 좀 더 맛있는 것을 해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요리강좌를 신청하게 됐어요."

권 씨는 지금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하면서 부부 사이가 훨씬 좋아졌고, 평생 가족을 위해 고생한 아내가 늘 웃고 있어서 가슴 흐뭇하단다. 아내의 건강이 점차 회복되면서 권 씨 부부는 같은 취미를 갖고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렸다. 같이 탁구를 치고 군에서 진행하는 스트레칭 강좌에도 참여한다. 얼마 전에는 충남도청에 마련된 평생교육원 칵테일 교실에 부부가 함께 등록했다.

"우리가 자랄 때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그래서인지 주변 친구들에게 요리를 같이 배우자고 권유했더니 '미쳤냐'는 반응이었어요. '마누라 있는데 왜 요리를 해야 하냐'는 식이었지요. 그저 평생 날 위해 희생한 아내를 위해 남은 생은 내가 밥을 해서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고 싶을 뿐인데 말이죠." 요리 뿐만 아니라 권 씨는 무척 다양한 취미 생활을 갖고 있다. 우표, 공중전화카드, 외국지폐, 술, 수석 등을 꾸준히 모아왔다. 또 '홍성산사나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원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고 여행 다니는 것을 즐겨했던 권 씨는 며느리와 손녀딸의 도움으로 4년 전 블로그를 만들고 지금까지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처음엔 막막했지만 하나 둘 자료를 올리고 산행 후기를 쓰면서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됐죠. 아, 이런 세상이 있구나. 블로그를 통해 신명나는 제2의 인생을 맞이한 셈이죠. 딴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랄까? 정말 행복한 경험이에요." 퇴직 후 권 씨도 여느 퇴직자들처럼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힘든 고비를 넘겨야 했다. 답답하고 공허한 가슴을 채울 수 없었던 권 씨는 등산을 하면서 위안을 받았다. 현재 17개의 산악회에 참여해 주말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국의 산을 누빈다.

"지금까지 정상을 정복한 것이 500회가 넘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엮어 산행 초보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산행 안내서를 출간하고 싶은 게 저의 남은 소망이에요." 요리에, 블로그에, 등산에 뭘 그리 바삐 사냐고, 혹은 그 나이에 머리 아프게 뭣 하러 이것저것 배우냐고 손가락질을 하는 주변 사람들도 있지만 '뒷방늙은이'가 되지 않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유하기 위해 권 씨는 죽을 때까지 무엇이든 배우면서 살겠다고 다짐한다.

"항상 배워야 합니다. 어린 손녀딸에게 배우는 게 결코 부끄러운 일은 아니잖아요? 욕심 안 부리고 사니까 정말 편해요. 남은 인생 고생하면서 내 곁을 묵묵히 지켜준 아내와 같이 지금처럼 즐겁게 살고 싶어요." 인터뷰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는 권명오 씨 부부의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이 봄날의 나른한 햇살처럼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