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문화의 바탕 말과 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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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문화의 바탕 말과 글 〈5〉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5.05.15 08:35
  • 호수 890호 (2025년 05월 15일)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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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범상스님</strong><br>석불사 주지<br>칼럼·독자위원​​​​​​​<br>
범상스님
석불사 주지
칼럼·독자위원

두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차례, 연재형식의 글은 연속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문화의 바탕으로서 역사, 민족, 국가 등의 정체성이 되는 말과 글에 대한 심각한 오염은 우리시대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숙제라는 입장에서 다섯 번째 글을 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 파블로프는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울렸다. 이렇게 길들여진 개는 먹이를 주지 않고 종만 울려도 몸은 먹이를 줄 때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이 같은 현상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마치 개가 먹이를 보고 군침을 흘리듯 매실의 신맛을 느꼈던 사람은 매실만 보아도 군침이 돌았을 테니 말이다. 망매해갈(望梅解渴)의 고사는 이를 방증하고 있다. 조조의 군사들은 오랜 행군으로 갈증에 지쳐있었다. 이때 조조는 ‘저 너머에 매실 밭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고, 군사들은 신맛을 떠올려 입에 가득 고인 침으로 목마름을 해소했단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직접 사물을 인식하지 않아도 말과 글로서 상황을 떠올리고, 몸이 반응하며 서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불교 선사들은 제자들에게 말과 글에 집착하지 말라며,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마구니법’이라 한다. 하지만 여전히 팔만대장경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세 가지 보물로써 귀의의 대상으로 받든다. 마구니법이라 할 때는 ‘불(火)’이라 말하고 종이에 써도 입이 뜨겁거나 종이가 타지 않으니 실재가 아니다. 하지만 말과 글은 깨달음, 즉 실재(實在)를 전하는 가장 요긴한 도구로서 진리와 버금간다는 것이다. 마치 약방문이 약은 아니지만 약을 짓는데 반드시 필요하고, 그 약을 먹어 병이 낫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불교 논사들은 이 문제를 약 400년에 걸쳐 치열하게 논쟁했고, 그 결과 말과 글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도구로써 세속제(世俗諦)라 하고, 말과 글로 표현되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를 승의제(勝義諦)로 정의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언어의 방식으로 마음에 저장되고 밖으로 표현돼 서로 소통한다. 봉고라는 상표를 단 승합차가 처음 나왔을 때 어머니는 ‘돼지차’라고 불렀다. 연유를 여쭸더니 둥그스름한 큰 덩치에 비해 작게 보이는 바퀴가 마치 돼지를 연상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머니께서 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했다면 지금도 봉고차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듯이 돼지차라 불렀을 것이다. 강아지 이름 역시 색깔이나 생김에 따라 ‘누렁이’, ‘백구’, ‘점박이’, ‘쭈구리’ 등으로 짓는다. 강아지가 성체가 되면 개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데 처음 만났을 때 강아지로 불렀던 탓에 성체가 돼도 여전히 강아지라고 부르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미 ‘톹’아지가 도야지를 거쳐 돼지가 됐고, ‘괴’아지가 괴앙이에서 고양이가 됐다. ‘아지’는 ‘아이’처럼 미성숙 생명체들을 지칭했다. 그런데 매실과 달리 돼지, 고양이라는 말에서 미성숙이라는 의미와 연상은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말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추세라면 머지않아 개라는 말은 사라지고 강아지로 정착될 것 같다.

말이 사라지면 그에 해당하는 개념과 함께 문화도 사라지거나 아니면 말은 유사개념에 사용되지만 문화가 사라진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문화의 특성상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외래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 문화를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온돌, 구들이라고 불리는 난방체계는 우리 한옥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보일러’로 대체 됐다. 온돌은 말 그대로 따뜻한 돌이며, 구들은 ‘구들을 놓다’는 말에서 보듯이 집안에 굴을 들여놓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구들은 연기와 열을 완벽히 분리시키는 것은 물론 바닥을 따뜻하게 함으로 더운 공기가 천정에 머무르는 난로와 달리 대류현상을 일으켜 효율적 난방을 이룬다. 이뿐만 아니라 난방할 때 생기는 열을 이용해 음식을 지음으로 부엌과 방이 분명하게 나뉜다. 이 덕분에 식탁 옆 주방에서 음식을 날라 오는 요즘과 달리 모든 음식을 상에 차려 방으로 들어가는 한상차림의 한식이 생겨났다. 한상차림은 주방에서 내어주는 순서대로 먹는 코스요리와 달리 자기 나름 먹고 싶은 대로 먹는 식문화를 만들어 냈다. 필자는 한국인의 창의성과 역동성은 한상차림 덕분에 먹고 싶은 대로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성을 만들었고 그것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온돌(구들)이라는 말 대신에 보일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주거형태의 변화로 부엌이 주방이 돼 실내로 들어왔다. 아직까지는 한상차림의 식사를 하지만 점차 서양의 식문화를 닮아가지 않을까 염려된다. 시대에 따르는 주거환경의 변화는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온돌이라는 고유의 단어를 보일러에 내어주면서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지켜온 한옥의 특성을 반감시키는 것은 물론 앞에서 열거한 식문화 등 민족성의 바탕이 희미해지고 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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