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일보 홍성=이정은 기자] 1960년대 말, 매서운 바닷바람을 뚫고 천북·대천·보령·오천 등 김 산지를 찾던 소년이 있었다. 양어깨엔 100장씩 묶인 김 200속이 굴레처럼 얹혀 있었다. 막차를 놓치면 달빛을 벗 삼아 광천까지 사오십 리를 걸어야 했던 소년은 50여 년이 흐른 지금, 그의 아들과 함께 전 세계 15개국에 한국의 맛을 전하는 수출 역군이 됐다. 1세대의 헌신과 2세대의 혁신이 쓴 ‘K-푸드’ 성공기, ‘광천별맛김’의 이재부 대표(74)와 아들 이성행 대표(42)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 1세대의 기록, 일과라는 말은 사치였던 시절
이재부 대표의 삶은 곧 광천 김의 역사다.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국민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생계를 위해 중학교를 중퇴하고 17살에 장사판에 뛰어들었다. 광천장은 4일과 9일, 독배장(임시장)은 3일과 8일에 열렸다. 광천 독배로 배가 들어오면 섬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시장은 늘 북적였다.
“안 해본 장사가 없어요. 과일, 은행, 대추, 깨… 다 말하자면 끝도 없습니다. 모도 심고, 참 별의별 일을 다 했죠. 어린애가 그렇게 물건을 팔러 다니니까 도매상들이 ‘이놈! 너 어디서 도둑질해 왔지?’하고 의심을 받기도 했어요.”
어린 장사꾼이 ‘김’과 마주한 것은 18살 무렵이다. 당시엔 지금처럼 냉동 탑차도, 번듯한 유통망도 없었다. 그는 김 산지를 직접 찾아가 김 100장을 묶은 ‘한 속’ 200개를 어깨에 짊어진 채 광천으로 돌아와, 가가호호 방문하며 김을 팔았다. 시발(始發)택시로 운행하는 대상(大商)들도 있었지만, 이재부 대표 같은 소상들은 걸어서, 버스를 타고 김을 날랐다.
지금은 일상 식품이지만, 그 당시 김은 귀한 대접을 받는 기호식품이었다. 김 한 속값이 보통 120~150원이었고, 최상품은 300원대, 저가는 80원짜리도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이나 김밥을 싸 오고, 보통 가정에선 김 한 속을 사면 이불 속에 애지중지 숨겨두었다가 제사상에나 올리던 때… 소년은 이 김을 가지고 서울로 향했다.
“당시엔 다 그렇게 몸으로 때웠어요. 차 살 돈이 없으니 걷고 또 걷는 수밖엔 없었죠. 대천 장날이면 새벽 기차를 타고 가서 김을 확보하고, 밤에는 천안역 근처 여관방에서 몇 시간 동안 김 띠지 작업을 했어요. 장항선에서 경부선으로 갈아타야 서울 중부시장 경매 시간에 맞출 수 있었으니까요. 한 번 움직이면 다음 날까지 이어지니까 ‘일과’라는 말을 쓸 수가 없죠.”
서울 가락시장이 생기기 전, 모든 수산물은 ‘중부시장’으로 집결됐다. 소년은 새벽 3시 반 무렵 시작되는 경매 시간에 맞추기 위해 쉼 없이 움직여야 했고, 중부시장 상인들은 그를 ‘꼬마 장사꾼’이라 불렀다. 김이 나오지 않는 공백기(여름)에도 꼬마장사꾼은 밤, 배추, 고추장 등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고, 때론 은행잎을 수출하기도 했다.
■ 2세대의 혁신, 후발주자의 핸디캡을 극복하다
아들 이성행 대표가 처음부터 가업을 이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손해사정사를 꿈꾸던 청년에게 ‘김’은 그저 아버지가 평생 고생하신 삶의 터전일 뿐이었다. 하지만 2005년, 아버지 이재부 대표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아버지는 몸을 추스르자마자 김 공장을 차렸고, 이성행 대표는 “아들 된 도리로서 딱 1~2년만 돕겠다”며 곁을 지켰다.
2006년 ‘별식품’ 설립 당시, 광천에는 이미 40여 개의 김 공장이 성업 중인 레드오션이었다. 김 제조에는 아버지 이재부 대표가 베테랑 기술자였지만, 판로가 큰 문제였다. 판매처가 없어 어머니와 함께 시장, 상가, 병원, 아파트 단지, 지하철역 등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다. 이성행 대표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너무 창피했지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었어요. 하루 생산하고 한 달간 팔고, 이럴 정도로 초창기엔 판매와 영업 부분에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3년 정도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영업을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현장을 겪으면서 우리 김이 다른 김에 비해 품질이 좋다는 걸 알게 됐어요.”
‘별맛김’의 품질이 독보적이라는 확신이 서자, 이성행 대표는 2018년 본격적으로 가업 승계를 받으며 조직의 전산화와 시스템 구축에 매진했다. 대기업 출신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전산 시스템을 도입하며 주먹구구식 운영을 탈피했다. 그 결과 10년 이상 근속하는 숙련된 직원들이 늘어났고 생산 효율은 극대화됐다.
■ 글로벌 영토 확장, 블랙페이퍼가 K-스낵이 되기까지
광천별맛김의 시선은 세계로 향했다. 2011년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해, 현재는 이탈리아·에스토니아·베트남 등 15개국에 제품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 해외 박람회에선 서구인들이 김을 ‘검은 종이(Black Paper)’라 부르며 초코시럽에 찍어 먹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현지화’를 택했다. 기름과 소금을 줄여 건강한 이미지를 심고, 외국인 입맛에 맞는 다양한 맛의 김을 개발했다. 이러한 노력은 점차 수치로 증명되기 시작했다. 2020년 ‘백만불 수출의 탑’ 수상에 이어, 2024년 실적을 바탕으로 2025년엔 ‘이백만불 수출의 탑’을 거머쥐었다. 2025년 실적은 삼백만불을 웃돌며, 올해 2026년 목표는 오백만불이다.
“저희는 후발주자입니다. 하지만 품질만큼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대기업 자본이 밀려오는 시장에서 중소기업이 살아남는 길은 결국 소비자에게 ‘별맛김은 최고 품질’이라는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역과의 상생, “광천김의 명성, 2세대가 지킨다”
별맛김은 기업의 성과를 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나누고 있다. 광천초 졸업생을 대상으로 3년간 장학금을 기탁해 왔으며,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이랜드복지재단을 통해서도 정기적인 후원을 이어가고 있다.
“광천초의 경우 학교에서 선정한 8~10명의 학생에게 1인 50만 원씩 장학금이 전달돼요. 올해는 하지 못 했지만, 한울초에도 지원한 적이 있고요. 서부면 산불처럼 지역에 어려움이 생기면 가능한 한 힘을 보태려고 합니다. 지역의 명성 덕분에 회사가 성장해 온 만큼, 다시 지역에 돌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어 이 대표는 광천김 산업 1세대들이 쌓아온 명성을 2세대가 책임감을 갖고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천김의 명성은 1세대들의 오랜 노력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경제적 이득이든 뭐든 사사로운 것 때문에 그 명성에 금이 가는 일이 없도록 2세대들은 책임감을 가져야 해요. 다행히 2세대들 간의 단합이 잘 이뤄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명성을 유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성장시켜야 할 역할이 저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지난달 26일 별맛김은 80억 원 규모의 ‘수산물산지거점유통센터(FPC)’ 건립 주체로 선정되며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원물부터 가공, 출하까지 한 곳에서 이뤄지는 이 센터가 완공되면 물류비 절감은 물론, 어가 소득 증대와 광천 김 전체의 품질 상향 평준화를 이끌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품질 관리와 수출 경쟁력 측면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 예상됩니다. ‘김 세계화’에 걸맞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조미김 수출량이 훨씬 증대될 테고, 그 외 수산물과 관련된 부가가치 상품을 개발할 예정입니다. 또, 광천에 거점센터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홍보 효과가 있고, 광천김 전체가 살 거라고 전망합니다.”
어깨에 짊어진 김 200속의 무게를 잊지 않으려는 아버지와, 그 무게를 세계적인 브랜드의 가치로 승화시킨 아들. 광천별맛김의 역사는 한 가족의 생계사이자, 광천김 산업의 축적된 시간이다. 이재부 대표는 아들에게 늘 “욕심부리지 말라”고 말한다. 이 짧은 한마디에는 평생을 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장사의 진리가 담겨 있다. 이성행 대표 역시 훗날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업을 넘기게 된다면, 매출 규모보다 ‘품질과 신뢰’라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