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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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 구재기<시인·칼럼위원>
  • 승인 2013.06.05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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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발칸 7개국의 여행에서 돌아왔다. 여행 중 수없이 보아왔던 옛 성당과 교회 경건함과 고성의 고고함과, 더불어 아드리아해안과 호수공원과 동굴 속의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그려졌지만 필자에게는 왜 그런지 불가리아나 루마니아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평화로움과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에 남아 있는 전쟁의 흔적들이 오버랩으로 좀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몇 발자국 건너뛰노라면 앞을 가로막는 산이요 강이요 언덕인 좁다란 우리의 국토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일 계속되는 북한의 전쟁 위협이 여행 중의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행 중 무엇보다도 가슴이 아파오는 것은 전쟁의 참혹한 흔적들이었다. 세르비아는 1989년 민주화 운동으로 동구권의 사회주의 정권들이 줄줄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부유한 편이었으나 내전기간 동안 유엔이 취한 경제봉쇄 조치와 1999년 3월부터 78일간 계속된 미국과 나토의 폭격은 이 나라를 폐허로 만들고 경제적으로 퇴보시켰다. 즉 1990년대 초 코소보 자치주는 분리 독립을 원했지만, 유고연방의 주축세력이던 세르비아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1998년 3월 코소보의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코소보 사태'가 발발하자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기다렸다는 듯 반격에 나서 코소보 반군과 반군지역 주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이른바 '인종청소'를 시작하였다.

이에 알바니아계는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며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평화안을 제시했으나 양측에서 모두 이를 거부한 3년 후코소보의 독립문제를 다시 논의하자는 안은 코소보가 반대했고, 코소보에 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자는 안을 세르비아가 반대하면서 세르비아의 학살행위가 계속되자 미국과 나토군은 세르비아에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밀로셰비치 정권을 무너지고 마침내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 국가들의 지원으로 2008년 2월 17일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전과 인종청소, 폭격의 역사를 경험한 베오그라드에는 아직도 일부 건물이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고 그 때 생긴 총탄자국도 선명히 남아 있으며, 겉으로 보이는 동유럽의 아름다운 분위기와는 달리 이 도시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유고연방 시절을 동경하고 있다고 하니 전쟁의 참혹함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하게 한다.

1980년 유고연방의 티토가 사망한 뒤 민족분규를 겪게 되고, 소련 해체와 더불어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면서 유고연방을 이루었던 각 공화국이 독립의 길을 가게 되었다. 1991년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가, 그리고 1992년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하여 유고연방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만이 신유고연방을 결성하지만 2006년에 몬테네그로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라는 이름은 완전히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해체 과정에서 학살과 전쟁을 수반한 끔찍한 기록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간직된 곳이 발칸반도 최대의 이슬람 도시인 사라예보이다. 그래서인지 사라예보에 들자마자 길가에 수없이 설치된 공동묘지가 먼저 보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분리 독립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세르비아군이 포위하여 공격하면서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내전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점령당했던 4개월 간 무려 1만 명이 사망하였다 한다. 지금도 이 도시의 아파트와 건물 외벽에는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보스니아 내전이 얼마나 참혹하였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전쟁은 언제나 악한 사람보다 선량한 사람들만 희생시킨다. 그래서일까, '전쟁'과 '평화'라는 두 단어를 떠올린 발칸 여행 후 구저분한 우리에 갇혀 던져주는 먹이에 살찌우고 있는 우리의 소나 돼지와는 달리 작은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는 평원에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겨가며 무한의 시선 속에 전개되는 노오란 유채꽃을 배경으로 하여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나 양떼들의 모습이 더욱 평화로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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