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신년특집] 말 이야기
갑오년 ‘갑’ 청색 뜻해 ‘청마의 해’
“청말띠 여성 팔자 세다”는 속설일뿐
정현왕후 등 조선 왕비 대부분 말띠
예로부터 말은 신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자로서의 의미를 가졌다. 기원전 69년 경주 알천에서 6부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뽑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 남쪽 양산 기슭의 한 숲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말 울음소리에 의아해 사람들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큰 알이 하나 있어 깨뜨려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알에서 나온 아이는 천년왕국 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다. 백마는 박혁거세의 탄생을 알렸던 것이다.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에서도 말은 지도자의 탄생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고대인들은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잘 인도하기 위해 무덤 안에 말 인형을 넣거나 중국에서는 실제 말을 죽여 함께 묻기도 했다.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는 그러한 대표적 상징이다.
말은 신과 사람을 이어주는 메신저의 뜻을 품고 있지만 외형적으로 진취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올해는 도전적이고 강한 힘을 상징하는 청색을 띠는 청마의 해라 그 어떤 말의 해보다 강인한 인상을 준다.
말이 지닌 권능은 타는 도구였기 때문에 대체로 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말을 탔다. 그래서 말 1필은 노비 2~3명과 바꿀 정도였다.
서양서도 말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중세 기사들에게 있어서 말은 기사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아서왕 전설에서 랜슬롯이 기네비아를 구하러 갔다가 말을 잃어버려 짐마차를 빌려 타자 기네비아에게 핀잔을 듣고 상심하는 장면이 있다. 또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말이 지쳐 말을 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측 지도자인 살라딘은 적이지만 그 정도 되는 자가 말도 없이 싸운다면 수치라며 자신의 말을 내준 이야기도 전해진다.
말은 죽어서도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였다. 갈기는 갓으로, 힘줄은 활로, 배설물은 연료나 마분지의 원료로, 가죽은 신발이나 가방으로 만들었다.
말은 식용으로 많이 먹히거나 하지는 않지만 유목민 등 일부 지역에서는 말고기를 즐겨 먹었으며 늙어서 노쇄한 폐마는 고기로도 유용했다. 말고기는 질기다는 인상이 있지만 늙은 말의 고기도 송아지 고기만큼 부드럽고 약간 단맛도 난다.
과거 말의 존재는 현재의 전차, 장갑차, 군용트럭을 합친 정도의 전략 물자였다. 우수한 말을 공급받을 수 있는 국가는 전쟁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으며 반대로 우수한 말을 공급 받지 못하면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중국 명 왕조는 조선의 군사력 증강을 막기 위해 말을 진상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근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태운 기병은 전 세계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말의 위상은 19세기 말 새로운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급격히 떨어졌다. 그럼에도 포니·갤로퍼·에쿠스와 같은 승용차 상표는 모두 말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말의 전통이나 이미지는 계속 살아있는 셈이다.
고대 말은 신의 사자로 신성한 동물로 인식됐지만 말과 교감이 점차 단절되는 현대에 와서는 신의 대리자로서 말에 대한 이면적 의미는 점차 퇴색돼 가고 있다.
최근 한 유아용품 업체는 올해 매출 전망치를 지난해보다 27%나 낮춰 잡았다. 청말띠 해에 때어난 여자 아이는 팔자가 사납다는 속설 때문에 출산율이 낮아져 매출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올해 뿐만 아니라 여성이 말띠면 팔자가 세다는 속설 때문에 말띠 해에는 유난히 여자 아이 낳기를 꺼린다. 말띠 해에는 여아 출산율이 낮아지는 반면 남아 출생률은 높아진다. 1978년 황말띠 해에는 출산율이 전해와 비교해 14%가 낮아졌고 1990년 백말띠 해에도 남자 아이가 예년보다 4% 많게 태어났다는 통계가 있다. 인위적인 낙태와 출생신고를 늦추는 식으로 억지로 말띠 여아가 태어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띠와 색상을 결합한 속설이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끈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07년 정해년이 황금돼지해이며 그해에 태어난 사람은 재물 운이 좋다는 말이 나오면서부터 띠와 색상을 결합한 속설이 관심을 끌게 됐다.
당시 한 해 동안 출생아는 49만7000명으로 전년보다 4만5000명이 늘었고 합계출산율도 1.25명으로 높아졌다. 황금돼지해 이후 2년은 연속으로 출산율이 하락했다.
흑룡의 해라고 불렸던 2012년 임진년은 팔자가 좋다는 속설 덕분인지 출산율이 1.3명으로 올라갔다. 그해의 속설에 따라 출산율이 출렁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띠와 색깔을 결합한 속설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미신일 따름이다. 조선만 하더라도 말띠 왕비가 많이 나왔다. 정현왕후, 인열왕후, 인선왕후, 명성왕후, 순정효황후 등 모두 말띠였다.
박혁거세는 말이 전해준 알에서 났고 부여 금와왕은 말이 눈물을 흘린 뒤 발견됐다. 옛 선조들에게 말은 팔자 사나운 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신성한 동물로 하늘의 사신으로 중요한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영물이었다. 근거 없는 미신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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