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들이]해주백자에 피어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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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들이]해주백자에 피어난 ‘나’
  • 범상<석불사 주지, 칼럼위원>
  • 승인 2014.04.0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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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중이 언제부터 신분이 해방된 ‘나’를 발견했을까하는 물음은 조금 엉뚱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신분계급(카스트)이 엄격히 존재하고 있는 인도사회를 들여다보면 피지배계급이 스스로 ‘나’를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인도의 최하위 카스트들은 평소는 물론 동네에 궂은일이 생기면 정해진 순번에 따라 처리를 맡는다. 차별과 멸시의 정도를 살펴보면 상위카스트가 물을 따라주면 짐승처럼 받아 마셔야 하고 잔치음식에 하위카스트의 그림자만 닿아도 부정이 탔다며 그 음식을 모두 버리고 다시 만든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하위카스트들에게 가해지는 상위카스트들의 폭압은 가히 우리들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사회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는 것일 뿐 정작 인도에서는 당연한 일이며 각각의 카스트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주어진 역할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자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며 수 천 년을 살아오고 있다.
이처럼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이 만들어 놓은 사회구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들은 출세한 사람이나 윗사람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다른 사회에 비해 종교 간의 반목이 적은 반면 지역감정과 일가문중(一家門中)의식이 강하여 지역과 문중 안에서는 옳고 그름이라는 최소한의 사회정의조차도 사라져버리는 기현상이 나타난다.
한국사회의 이러한 현상들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임금에 충성하고 친구와는 신의를 지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던 성리학의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효도, 충성, 신의 등은 겉으로 드러나는 대의명분이 너무나 분명해서 피지배재계급들이 감히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절대명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는 국가(지배계급)가 국민(나)에게 지녀야 할 민주국가의 기본책무는 배제되어 있다. 이처럼 민주국가의 이념과는 상반되는 국기에 대한 맹세에 대해서 별다른 저항 없는 것은 충성이라는 강한 대의명분과 효제충신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사회의 뿌리 깊은 정서에 기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한국인들은 효제충신이라는 뿌리 깊은 관습문화의 영향으로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헌장’ 이후 현재까지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개인의 권리보장을 요구하는 일에 소극적인 반면 국가를 위한 개인의 무조건적 희생은 당연하고 정의롭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항공대 최봉영 교수는 위와 같은 환경 속에서도 우리민중이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기점으로 ‘나’를 자각하고 강렬하게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그 증거로서 종전보다 훨씬 커지고 활달한 필치로 대담하게 표현되는 해주백자의 크기와 그림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청화백자연적에 한글로 ‘나’라고 새긴 것은 한국인이 만든 물건 가운데 가장 또렷이 ‘나’를 표현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았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로써 나라를 빼앗긴 아픔이 있었지만 민중은 ‘나’를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민중의 ‘나’에 대한 자각은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과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경제발전의 역동성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것 사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돈자붐니다”라는 백자에 새겨진 문구가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말과 글 즉, 학문이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하듯이 물건에도 생각과 철학이 담겨있고 그것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최봉영 교수가 해주백자와 나전칠기 외에도 평생의 재산을 모아 수집한 19세기 말에서 현재까지의 물건들을 상시 전시할 공간을 찾는다며 장소를 물색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작은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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