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렁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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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이에게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4.04.0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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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39>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죽어도 할 일은 마친다는
비장의 각오,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에 따라
발걸음을 당차게 내딛어야 한다

줄 것도, 알 것도
더더구나 깨칠 것 없어도
요구되는 것은
땀과 노력과 지혜
언제나 한계 있기 마련인 것

그러나, 자신을 모르고는
어느 것도 할 수가 없다
삶과 죽음이 맞닿은
여기, 생은 어디를 좆아 왔으며
죽음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좀 더 크게 발걸음하면
비로소 기운은 넘쳐흐르고
가는 길이 점점 넓어질 것이며
머리가 차츰 맑아지면
죽음은 되레 편안해질 것이다

련은 조선 성종 25(1494)년에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외조부 밑에서 자랐는데, 부모가 없어 불쌍하다는 뜻으로 이름을 ‘련(憐)’이라 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나서 18세 때인 중종 6(1511)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19세인 중종 7(1512)년에 제주목 판관이 되어 부임하였는데,이는 역대 판관 중에 최연소자였다. 그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그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김녕리 석굴(김녕사굴)에 큰 구렁이가 살고 있는데, 구렁이가 돌풍과 비를 일으키고, 독기를 내뿜어 주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 극심합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굴 앞에 15세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굿을 합니다. 그러면 구렁이가 나와서 처녀를 물고 굴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석굴의 구렁이는 열과 연기를 싫어하므로 기와를 굽지 못하여 백성들의 집은 물론 관아의 건물마저 띠로 지붕을 잇고 있습니다.”
그는 곧 구렁이를 물리쳐 구렁이에 대한 공포감에서 벗어나고 해마다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주민들에게 기와를 구워 지붕을 잇게 하였다. 주민들은 판관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따르면서도 구렁이의 화가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자 그를 믿고 따랐다. 판관은 이에 힘을 얻어 구렁이를 아주 없앨 계획을 세웠다.
다음해 구렁이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 다가오자 그는 전처럼 똑같이 제물을 바칠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굴 앞을 파고 숯불을 피워 놓고, 무당에게 풍악을 울리며 굿을 하게 하였다. 그러자 잠시 후 구렁이가 나와 제물로 바친 처녀를 삼키려고 하였다. 판관은 때를 놓치지 않고 긴 창으로 구렁이를 찔렸다. 군졸들도 달려들어 창과 칼로 찔렀다. 마침내 구렁이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자 이를 끌어내어 숯불에 태워 죽였다. 마을 주민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때 무당이 판관에게 말하였다.
“판관님, 어서 말을 타고 관아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가시는 도중에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군졸들과 함께 말을 타고 관아를 향하여 달렸다. 그 때 붉은 기운이 구름처럼 그의 뒤를 따랐다. 이를 본 군졸이 ‘피구름이 몰려온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에 판관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붉은 기운이 서련 판관을 덮쳤다.
관아로 돌아온 서련 판관은 이름 모를 병으로 앓아누웠다. 그리고는 끝내 1515년 제주 관사에서 숨을 거뒀다. 제주 주민들의 통곡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데새끼 구렁이 한 마리가 상여에 숨어서 따라왔다. 사람들은 구렁이를 죽이지 않고 그의 유해가 안장된 구항면 지정리 보개산 아래에 조그만 연못을 파고 살도록 해 주었다. 한편 제주도 사람들은 굴 옆에 서련 판관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 그의 용기와 애민정신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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