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례를 하고 나서는 수미의 얼굴은 축축 늘어지는 몸에도 불구하고 활짝 피어났다.
왕순은 머리를 싸매고 누웠다. 공갈협박 이후 미애는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방을 차지하고 누워서는 안방마님 행세를 하고 있었다. 자기 맘대로 옷장을 발칵 뒤집어 새로 정리해놓지 않나, 진호에게 이거 해라, 저거 사와라 심부름을 시키지 않나.
왕순은 서랍장 위를 쳐다보았다. 함박웃음을 짓는 밥상만한 미애의 얼굴이 액자에 담겨 놓여있는 게 보였다.
“이 액자를 이 자리에서 1밀리미터라도 옮겨 놓으면 각오해욧.”
안 먹겠다고 버티는 짬뽕을 억지로 시켜먹이고 나서 미애가 한 말이었다. 빼도 박지도 못하게 덜미 잡힌 신세를 아무리 한탄해봐도 소용이 없ㅅ는 일이었다.
“형, 형!”
문밖에서 들리는 숨넘어가는 진호의 목소리에 왕순이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또 오냐?”
“응? 누가?”
“헤비급 말야.”
왕순이 팔을 크게 벌리며 우거지상을 지었다.
“아냐. 형 애인은 안와.”
“뭐? 애인? 너 날 놀리는 거냐? 임마!”
“앗! 나의 실수. 미안해 형.”
쥐어박을 듯한 왕순의 기세에 진호가 뒷걸음질치며 손을 비벼댔다.
“그럼 무슨 일이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왕순이 다시 앉았다.
“왕눈이 수퍼에서 일하던 여자애 말야.”
“응 수미라는 애?”
“그 애가 안 보이던 걸.”
“그래?”
“그만 뒀대.”
진호가 아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자식. 맘에 있었나보군.”
중얼거리던 왕순은 창백한 수미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뜻 듣기에 현우랑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하던 것 같은데. 단골수퍼라서 알게 됐다가 배달 가는 길에 동행을 한 적이 있어서 집도 알고 있는 왕순이었다.
‘집이 어려워서 일을 그만 둘 형편은 아닐텐데..’
왕순은 시간이 나면 집에 한 번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벌렁 드러누웠다.
날이 어둑해졌다. 현우는 목이 칼칼한 듯 자꾸만 기침을 하는 진영의 팔을 흔들었다.
“이제 그만 하자.”
“그럴까?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책을 덮으며 진영이 싱긋 웃었다. 모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3학년 들어와서 학교에선 1등만 한다고 아이들에게 따돌림 받고 집에서 의대갈 성적이 안된다고 꾸지람 듣느라 살맛이 안 났었는데 이제야 사람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가자. 내 음료수 한 잔 살게.”
현우가 가방을 들쳐메며 먼저 일어섰다.
교문을 나서던 두사람의 발걸음이 갑자기 우뚝 멈춰졌다.
“그림 좋은데.”
종호네 패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 걸터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며 비웃음을 흘렸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