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을 찾아]⑤ 김갑용 도예가 (금마면 인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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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을 찾아]⑤ 김갑용 도예가 (금마면 인산리)
  • 서용덕 기자
  • 승인 2014.05.08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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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삶 오롯이 담긴 녹청자
“30년간 계승·복원에 힘썼죠”


고려~조선시대 쓰던 그릇들 명맥 되살리려 연구 몰두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 아무도 없어 내가 나섰죠” 
“돈 벌 생각했으면 못했을 일 후학들에 꾸준히 전수할터”



우리나라 도자기라고 하면 흔히 고려 귀족의 화려함을 청아하고 맑은 비색으로 담아낸 청자와 조선 사대부의 고고함을 순백으로 담백하게 표현한 백자 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녹청자라고 하면 처음 들어본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도연 김갑용(57) 도예가는 금마면 인산리 출신으로 30여년 동안 인천 경서동 녹청자를 재현하고 계승 발전시키는데 온힘을 쏟아왔다. 녹청자는 청자와 백자 등과는 달리 표면이 거칠고 유면 역시 고르지 못하다. 녹청자는 귀족과 사대부의 고급 도자기와 비교해 다소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질박하고 독자적인 유색으로 다른 자기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멋을 갖고 있다.

녹청자는 사치품이 아닌 일상생활에 흔히 쓰이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고려 초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세월동안 백성들의 삶 속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아 왔으나 명맥이 끊기며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끊어진 녹청자의 명맥을 되살린 김 작가의 몸에는 도예가의 피가 흐른다. 김 작가의 선친 고 김동진 씨는 금마에서 5대째 가업을 이어 옹기를 구웠던 옹기장이였다. 선친이 옹기 공장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지만 그는 다른 일보다 흙을 만지는 일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그래서 그는 1978년 이십대 청년이 되어 도자기를 빚고 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도 다른 도예가처럼 청자와 백자, 분청사기 등을 만들었다. 1989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기념 성체도자기를 제작해 바티칸 시티 성 베드로 성당에 소장 전시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인천 경서동에서 발굴된 녹청자 도요터와 녹청자를 접하게 된 것이다. 인천 경서동에 위치한 녹청자 도요지는 사적 제211호로 10·11세기에 걸쳐 청자를 만들었던 가마터다. 이 가마에서 구운 녹청색의 짙은 청자는 표면이 고르지 못하며 문양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드물게 병의 몸통에 주름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마의 남은 부분에 보호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지만 나머지 일대는 골프장으로 변했어요. 사실상 방치나 마찬가지라 녹청자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사라질까 걱정됐습니다. 귀족이나 사대부들이 남긴 도자기와 달리 녹청자는 서민의 숨결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도자기입니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인데도 아무도 나서질 않으니 결국 제가 맡게 됐네요.” 그때부터 그는 녹청자를 현대에 되살리기 위해 녹청자의 제조법을 찾는데 고심했다. 그러나 수많은 고서적을 살펴봐도 녹청자 제조법을 찾을 수 없었다. 김 작가는 녹청자 파편을 토대로 사용된 흙과 유약 성분을 찾고자 홀로 연구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김 작가는 사라진 녹청자를 현대에 되살릴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수많은 국내 전시와 시연 외에도 2010년 G20 문화대전과 일본문화원 개관기념, 인도네시아 초대 녹청자 출품 전시, 2012년 서울핵안보정상회의 개최기념 청와대사랑채 시연작가 작품초대전에 초청돼 세계 정상들과 해외언론에 선보여 찬사와 환영을 받았다. 또 지난해 6월에는 특허청으로부터 ‘특허 제10-1275348 녹청자용 유약 조성물 및 이를 이용한 녹청자의 제조방법’이라는 녹청자 제조 관련 특허를 국내 최초로 획득했다.


김 작가는 “도자기가 탄생하는 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설렘과 기쁨을 느낀다”며 “돈을 생각하고 도자기를 만들었다면 녹청자를 되살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예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크다. 2005년에는 만해 한용운 선사 ‘님의 침묵’ 도자기를 제작해 전국에 보급하는가 하면 온양문화원 충무공 거북선 문양 도자기도 그의 작품이다. 2010년 열린 녹청자 현대도예공모전 특선을 비롯해 미국 뉴욕전 미술작가상, 서울미술제 대상, 국제종합 예술대전 도예부문 대상, 세계문화예술 대상 등 수상 내역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천년의 세월을 이은 장인이 설 자리는 너무나 좁았다. 최근 그의 공방이 도시개발사업으로 갈 곳을 잃게 된 것이다. 토지주가 아닌 김 작가는 가마 한 대 값도 안 되는 보상을 받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넉넉지 않은 생활에도 김 작가가 항상 행복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은 ‘우리의 전통을 후대까지 계승 발전한다’는 자긍심과 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을 생각하고 녹청자 복원에 뛰어들었다면 지금까지 해오기 어려웠을 겁니다. 흙이 좋아서, 도자기가 좋아서 할 수 있었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도예를 하는 청년들이 줄어 한국 도예의 명맥이 끊길까 걱정이다. 그의 아들조차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며 일찌감치 다른 직업을 가졌을 정도다. 다행히 김 작가의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후계자로 녹청자 제작을 잇고 있다.

김갑용 작가는 “녹청자 비법을 자식들에게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열의 있는 후학들에게 전수해 후대에까지 널리 녹청자가 계승 발전됐으면 한다“며 ”녹청자가 과거 선조들의 삶 속에서 함께 했듯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도 함께 숨쉬는 도자기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김갑용은 누구
△금마초등학교 졸업△한국전통진흥협회 이사 △인천 녹청자보존회 전문이사 △경서 녹청자 인천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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