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얼굴의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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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얼굴의 이순신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4.08.18 11: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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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이 천만 관객을 훨씬 넘기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국민들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사랑이 여전하다는 것이 그 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이면 훤히 알 수 있는 내용의 영화를 대통령을 비롯해 천만 명 이상이 관람하였다는 것은 이순신에 대한 사랑을 넘어 그의 리더십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지 않는 현실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속에 드러누워 있는 세월호를 언제쯤 인양할 것인지는 아직 기약도 없고,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자는 정치인들은 소소한 이해관계로 옥신각신하고 있다. 유병언이 진짜 죽었느냐 아니냐로 유언비어가 나돌고,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대통령은 누구를 만났기에 청와대를 비웠느냐고 일본의 극우 신문은 빈정거리고 있다. 적과 싸워야 할 군인들이 서로 군기를 잡는다고 때려죽이는 오합지졸의 모습에 국민은 분통을 터뜨리지만, 중병에 걸린듯한 이 군대는 스스로 몸을 추스를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명량대첩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구와 싸워 이긴 이순신 장군이 다시 돌아온다면 이 지리멸렬한 모습을 뭐라고 일기에 적을까?

‘난중일기’속의 이순신은 모질 정도로 규율을 잘 지켰다. 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예외 없이 가혹한 벌을 내리고 심지어 처형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공적인 일에 일벌백계로 다스리던 그에게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은 곳곳에 부하직원과 백성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 일기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왜구에 쫓겨 피난길에 오른 백성들의 모습에 가슴아파하며 심지어 모두 피난을 떠나 비어있는 집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달빛에 밤바다가 애잔한 모습을 드러내면 그는 많은 상념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시인이 되기도 한다. 그가 더욱 따뜻해 보이는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저녁이면 늘 식은땀으로 옷과 이부자리를 적시면서도 아산에 계신 노모(老母)가 편안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다. 왜구에 의하여 막내아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목 놓아 울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장수가 아닌 정 많은 인간, 이순신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이순신은 남들보다 훨씬 뒤 늦은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에 부임하였지만 여진족에게 패하여 백의종군하는 무명의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유성룡의 도움으로 47세가 되어서야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된다. 왜구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던 조정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군과 싸울 것을 예측하여 거북선과 총포, 조총을 만들기도 한다. 군대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싸울 의지마저 없는 군대를 추슬러 군량미를 자급자족할 농토를 개간하고, 전쟁을 하지 않을 때는 청어와 같은 고기를 잡아 말려두기도 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디에서 싸울 것인가 바다의 지형지물을 동네의 경험 많은 노인들로부터 들어 전술에 응용하기도 한다. 그는 준비에 준비를 거듭하여 이길 전쟁에만 나선다. 지금 보면 훌륭한 CEO가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을 전라도가 아니라 경상도 앞바다를 책임지는 수군절도사로 임명했었더라면 임진왜란은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삿된 생각을 잠시 해보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늘 인사가 문제다.

경상도 지방을 통과한 왜구가 한양에 이르자 급히 피신을 떠난 선조임금은 이순신이 경상도 앞바다에서 싸울 것을 명하지만 그는 명령에 급히 따르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싸움은 질 수 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피신가려 했던 선조는 자기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그를 압송하여 고문한다. 정탁(鄭琢)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한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던 그가 임금의 명령에 잠시 따르지 않는 기개(氣槪)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유성룡은 ‘징비록’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순신은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 받으려 하지 않았다...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 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말타기 활쏘기를 좋아하고 더욱이 글을 잘 썼다.’ 원균을 비롯한 상관과 잘 맞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그의 타고난 기질과도 무관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순신은 용맹한 장수요, 꼼꼼한 CEO요, 글을 잘 쓰는 선비의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모습도 모두 그의 글쓰기 결과물인 ‘난중일기’에 근거한 것이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이순신을 한국을 빛낸 몇 명 안 되는 문장가로 꼽고 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이 무인에게도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국보76호 ‘난중일기’는 웅변해준다. 이순신이 허접한 인간으로 그렸던 원균의 글은 눈에 띄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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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정 2014-09-02 08:39:55
어릴때 국사시간에는 늘 싸우는 역사만 공부를 했다. 어린 나이에도 이상했다 왜 그렇게 싸우기만 하는지를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그리도 싸우기만 하는지를...자긍심을 키워주기보다는 왠지 모를 자멸감들 그것은 일본에 의해 쓰여진 것이 많아서 그럼을 어렴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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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얼굴의 이순신 자부심을 가지며 이순신 관련 책을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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