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문율 (不文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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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율 (不文律)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5.01.0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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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홍대입구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일기예보에선 많은 양의 눈이 내릴 것이라고 했으나 예고와는 다르게 눈 대신 진눈깨비가 제법 내렸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홍대 거리는 궂은 날씨와는 상관없이 온통 사람들로 붐볐다. 약속 시간에 다소 늦을 것 같아 미리 준비한 우산을 쓰고 수많은 사람들을 빠르게 지나치며 발길을 재촉했다.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대한 빌딩 처마 밑에서 겨울날의 오후에 내리는 진눈깨비가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많은 인파들을 이리저리 비켜가며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진눈깨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가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보였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백발의 할머니나 그 휠체어를 밀고 있는 늙은 딸이나 당혹스럽게 내리는 겨울날의 진눈깨비에 속수무책이었다. 아마도 한참을 걸어 왔는지 딸의 긴 파마머리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고 노파의 어깨 또한 잔뜩 움츠려 있었다. 나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제 우산을 드릴 테니 할머니와 쓰고 가세요” 다소 놀란 듯 늙은 딸은 잠깐 움찔하더니 이내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헤치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잔잔히 웃으며 자신의 우산을 보여주었다. “저도 있는데 두 손으로 휠체어를 밀려니 우산을 쓸 수가 없네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들을 지나치려는 찰나, 휠체어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나를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나의 호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려 했던 듯싶다. 그들을 지나쳐 다시 약속 장소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무언가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기운이 내 속에서 올라왔다. 별것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구나’하는 스스로의 안도감 내지는 뿌듯함이었던 것 같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어느 조직이나 사회에서든지 법과 규칙이 강제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도덕 혹은 배려라고 말한다. 이러한 도덕과 배려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사회적 불문율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겠다. 불문율이란 알게 모르게 서로가 납득하여 어느 샌가 암묵적으로 규칙이 되어버린 것을 뜻한다. 진눈깨비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우산이 내게도 소중하지만 더 필요한 타인에게 쉽게 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내 의식 속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응당 해야 할 불문율 즉, 당연한 규범이라는 인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그 불문율을 무시했다 하더라도 법적인 처벌을 받거나 사회적인 제약을 받지는 않지만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공통된 약속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야구에는 여러 가지 불문율이 존재한다. 노히트노런을 향해 역투를 펼치는 투수에게 기습번트를 대어서는 안 된다.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을 경우 도루를 해서 상대방을 자극해서도 안 되고, 홈런을 쳤을 때 화려한 세레머니를 하여 상대팀에게 모멸감을 주어서도 안 된다. 타자를 삼진으로 잡은 후에 투수가 미친 듯이 기뻐하거나, 슬라이딩 할 때 스파이크를 높게 쳐들어서도 안 된다. 스포츠에서의 각종 불문율은 비록 경쟁에게 이겨야할 상대팀이지만 승부를 떠나 서로 존중하면서 페어플레이를 하자는 일종의 배려심이 기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불문율을 어겼을 경우, 여지없이 다음 회에 상대투수가 타자를 공으로 맞히는데, 이것 또한 야구의 오랜 불문율에 해당한다. 경기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잃었을 때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가끔씩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불문율을 무시하여 매우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배나 비행기에서 사고가 났을 때, 선장이나 기장은 그 사고로부터 승객을 안전하게 대피시켜야 하는 의무를 갖는다. 물론, 선장이나 기장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그들은 먼저 모든 승객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나서 맨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탈출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배와 함께 또는 비행기와 함께 자신의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나름의 불문율이 있다. 그러한 불문율이 무시된다면 큰 인명피해가 생기는 참사가 발생된다. 이렇듯 상황에 따라서 불문율은 일종의 엄격한 의무가 되기도 한다.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에서부터 무거운 할머니의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 모두가 우리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불문율이자 의무이다. 이러한 불문율(또는 배려와 존중)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빈부격차나 지역감정을 떠나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사회 통합이란 큰 프레임을 구축할 수 있다. 장황한 설명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초등학교에서 이미 배웠던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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