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호!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신중이다. 그런 걸 가지고 공연히 내가, 하는 생각보다는 십 년쯤 묵은 체증이 단번에 쑥 내려가 버린 (아직 경험은 없지만) 기분이었다.
하루 낮 동안의 온갖 심각, 고민, 필사적인, 간절한 모든 것들로부터 탁 풀려나게 된 신중은 어느 때보다도 유쾌해져서 씨익 웃었다.
“호동아.”
부르는 목소리도 우렁찼다.
“응?”
“너 말야, 오늘은 내가 얼마든지 살테니 맘 푹놓고 먹어.”
“정말야?”
“정말이지 않고. 정말이라기보다는 진실이다.”
그것은 파격적인 선심을 쓰겠다는 신중의 선전포고였다.
“그거라면야 내가 항상 원하고 있던 바지!”
마다할 호동이 아니었다. 또한 그가 다시 먹은 만큼의 메뉴를 곱배기로 먹기 시작한 것 역시 하나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먹는 거라면 당연 호동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밝힐 필요도 없다. 안건이 그렇게 처리된 이상 표결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절차에 의해 판결 봉을 땅땅 치다가 시끄럽게 연단에서 몸싸움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이윽고 신중의 감격에 젖은 목소리가 순수한 육성으로 흘러나왔다.
"호동아."
"응?"
"넌 진정한 내 친구야."
"짜식은……!"
호동이 피식 웃었다. 신중은 계속 진정으로 말했다.
"우리 이 우정은 영원히 변하지 말자."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맞았어!"
신중은 호동을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으로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는 감격했다.
자신이 점찍은 수연을 호동이 넘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벌써 콧물이 흐를 정도로 감격했다. 그렇게 멋진 친구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당연 행운아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일 그 반대였다면, 하는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칼이 공중으로 치솟는 상태에서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릴 것만 같고 보면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수연과의 진행에 대해 신중은 호동을 전적으로 믿고 그의 방법에 따를 결심이었다.
자신의 용기로는 무엇 하나 해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가슴 설레게 만든 수연에게 접근하는 일이나 방법은 고사하고 멀리서 눈을 마주칠 용기조차 생길 것 같지 않았다.
풋내기가 풋사랑에 젖어 풋고추를 긴장시키다 보니 모든 게 풋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수연(아직 신중은 그 이름을 명확히 알고 있지 못했지만)이 다가와 미소라도 주면 오줌을 질금거리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은 신중이었던 것이다.
"호동아. 난 너만 믿겠어. 이 심정 이해할 수 있지?"
그것은 거짓 하나 없는 하느님께 맹세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솔직한 신중의 고백이다.
<계속>
"너 그러다 공연히 상사병 나는 거 아냐?"
"전설의 고향은 아니잖아."
"상사병에도 시대가 다르다든? 어쨌든 좋아. 나만 믿어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구원을 주시려면 일원 보태서 십원을 주시고?"
"싸나이로 태어나 할 일도 많다만, 나라 위해 한 목숨 바치기로 한 내가 그거 하나 해결하지 못한대서야 말씀이나 되겠냐?"
"그래. 지구가 변해서 금성이 돼도 넌 내 친구야. 바다가 육지로 변해도 변치 말자. 알았지?"
"두 말 하면 잔소리지, 세 말 하면 단편소설이구."
그쯤에서 신중은 완전히 긴장을 풀어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그와 함께 간사한 마음처럼 앞으로의 일의 진행에 대한 궁금증이 체면을 무시하며 고개들었다.
"호동아."
신중은 그 말을 묻기 위해 정색을 했다.
"앞으로 어떡할 계획이니?"
"신경 끊어."
"왜?"
"이미 생각해 뒀거든."
"과연 넌 천재야. 벌써 방법을 생각해 뒀단 말이지?'
"남은 것은 D데이를 언제로 잡느냐 뿐이야."
"그래? 그게 뭐지, D데이라는 거 말야."
"나도 몰라."
"뭐라고?"
"지난 주말 문화방송의 주말의 명환지 뭔지에서 그러더라."
"누가?"
"크린트 이스트 베스투우든가, 하여튼 그런 비슷한 이름가진 배우가 그렇게 말했어. 하긴 영어였다면 알아듣지도 못했겠지만……"
호동은 가끔씩 하는 버릇대로 뒷통수를 한 번 쓰윽 긁적였다.
"하여튼 좋아. D데이가 뭔지 모르지만 뜻은 짐작할 수 있어."
"역시 너구나. 대뜸 뜻을 알아차리는 걸 보니까."
"그 날을 언제로 잡을 거니?"
신중은 그 때까지 D데이의 정확한 뜻을 몰랐다. 호동보다는 나은 편인데도 그랬다. 마음속으로(D-day)일 것이다 라고만 생각했다.
그 문제에 대해 호동은 전혀 무감각 했지만 신중은 그렇지 ㅇ낳았다. 그날 집에 도착하는 즉시 사전을 펼쳐들고 확인했다. 그게 바로 공격 개시일, 혹은 일반적으로 계획개시 예정일 또는 목원일 등 의 뜻임을 머리에 새겨둔 것이다.
신중과 같은 학생이 있는 한 영어가 한국 땅에 들어와 몹쓸 전염병에 걸릴 일은 없는 터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 보면 소름이 오싹해진다.
만일 영어에도 사람처럼 에이즈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한국 땅에 있는 것이다. 미국 땅 몇 달만 밟아도 벌써 혀를 굴리는 골 때리는 족속들이 가고 나면 눈에 들어오는 현실이니까.
즉 영어의 에이즈는 한국 땅에서 걸려 영원히 매장되고 말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 <계속>
저작권자 © 홍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