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맛이 쓴 홍성역사인물축제와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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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맛이 쓴 홍성역사인물축제와 족보
  • 홍주일보
  • 승인 2016.09.1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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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일이 또 어디 있습니까? 최영 장군, 성삼문 선생, 한용운 선사, 김좌진 장군이 어째서 홍성의 역사인물입니까? 홍주의 역사인물이라면 몰라도요. 역사를 왜곡해도 유분수지. 멀쩡한 사람을 뭘로 만드는 일을 행정에서 하면서 군민과 국민들에게 뭐라고 할 것이여. 홍성역사인물축제 구경허러 오라고? 무식하고 참으로 한심한…족보도 없는 놈들이라는 말도 있듯이 족보도 없는…그러니 제 고장 족보도 모르지?” 지역의 한 어르신으로부터 받은 전화 한통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로 들렸다. 다만 홍성역사인물축제에 관한 항의성 조언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전화를 받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족보도 없는 놈들’이라는 말이 콕 박혔다. 한동안 ‘족보도 없는 놈’이라는 말은 ‘상놈’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욕설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족보가 없다’니, 그렇다면 ‘순수하고 고귀한 혈통’의 족보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1476년에 간행된 안동권씨 족보라고 전해진다. 과거 양반 사대부 가문에서 족보편찬이 일반화한 것은 이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고 한다.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양반 사대부보다 그럴 수 없는 상놈(상한, 常漢)과 천민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족보도 없는 놈’이 대다수이던 시대에는 이 말이 욕이 될 수 없었다고 한다. 남의 집안 족보에 자기 이름을 올려 신분을 세탁하는 모록(冒錄)은 조선후기에도 있었으나, 신분제가 공식 소멸한 뒤에 오히려 흔해졌다고 한다. 성(姓)이 없던 천민들은 새 성씨를 만들기보다는 주인집 성을 따르는 쪽을 택했다고 한다. 물론 족보에 자기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거액이 필요했던 시대다. 염상섭의 소설 ‘삼대’에서 조의관이 족보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쓴 돈이 당시의 돈으로 3000~4000원에 달했다고 하듯이. 당시에 쌀 한 가마니 가격은 10원 정도였다니 말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한 뒤, 종이도 부족한 상황에서 족보 발간이 급증했다고 한다. 한편에는 사라질 성씨에 관해 마지막 기록이라도 남겨두자는 충정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족보도 없는 놈’ 처지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근본이 있고 없고의 차이 등을 ‘족보도 없는 놈’과 ‘있는 놈’으로 대별되고 있는 실정이다. ‘홍성인물’이 아닌 ‘홍주인물’이라는 얘기의 뒷면에는 ‘족보의 있고 없음’의 차이적 인식의 지적인 듯싶다. 역사문화적으로도 현종대인 1010년대부터 탄생한 ‘홍주’라는 지명에 대한 인식과 가치, 의식의 역사적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홍주시대’란 1000년 세월의 본질적 역사문화의 족보를, ‘홍성시대’란 족보도 없는 이름으로 100년의 세월을 넘긴 ‘상놈’과 ‘천민’이란 의미는 아닐 테지만. 본질적 의미와 가치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지적일 것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창씨개명’된 이름은 되찾았으면서도 ‘창지개명’된 ‘홍주’라는 족보를 되찾지 못해 발생되는 왜곡현상일 터. ‘순수혈통’을 되찾아야 할 우리들 삶의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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