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배출한 덕 있고 물 좋은 덕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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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배출한 덕 있고 물 좋은 덕정마을
  •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2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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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28>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광천읍 상정리 덕정마을

와우형 산인 제기산 둘러진 배산임수형 명당자리 덕정마을
광천 유일 독립운동가·덕명학교 창립자 서승태 선생 배출해
큰 덕 베푼 아낙 덕정서 기도하고 임신한 전설 전해 내려와
노인회 매월 정기모임·명절이면 돌아온 귀성객 화합 도모해

▲ 지난 1월 김석환 군수 순방 당시 덕정마을 주민들과의 기념촬영.

◇주민 간 화합 잘 되는 덕정마을

광천읍 상정리 덕정마을은 은하면과 경계에 위치한 광천읍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덕정마을은 마을 앞으로 상지천이 흐르고 상지천을 이웃해 덕정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들을 이웃해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 뒤편으로는 제기산이 둘러져 있는 배산임수형의 마을이다.

마을 뒷산인 제기산은 예부터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의 산이었기 때문에 소가 안고 있는 형태로 마을 전체가 명당자리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마을 입구의 통봉산이라 불리는 작은 동산같은 산은 뒷산인 제기산의 형상인 소의 여물통이라고 불려왔다. 실제로 멀리서 마을을 바라보면 주민들의 이야기대로 누워있는 소가 여물통을 옆에 두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통봉산은 현재는 개인 사유지로 많은 부분이 깎여나가 과거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졌다.

▲ 덕정마을에 남아 있는 소나무.

또한 마을이 곡식을 품은 키 형태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는데, 곡식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마을길을 중심으로 50여 그루의 노송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 경지정리 및 도로개선 사업을 하면서 사라지거나, 병 들어 죽은 소나무가 많아 현재는 10여 그루의 소나무가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덕정’이라는 이름은 덕이 있고 물이 좋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인데, 예로부터 물이 맑기로 유명한 동네였기 때문에 애초 마을이름은 ‘덕우물’이라고 불리었다. ‘덕우물’로 불리던 것이 발음이 어려워 쉽게 부르게 되며 ‘저그물’로 불리게 됐고 한자로 지명이 바뀌게 되면서 덕(德) 자에 우물 정(井)자를 써서 현재의 덕정마을이라는 지명이 됐다. 덕정마을은 동쪽으로는 신촌마을, 서쪽으로는 야동마을, 남쪽으로는 다진마을, 북쪽으로는 백동마을과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은하와 광천에 걸쳐 아시아 최대의 석면 광산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마을이 바로 덕정마을이었다.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광부 일을 하러 덕정마을에 많이 몰려들었고 광부들을 상대로 술집이 성황을 이뤘다. 이 탓에 마을 주민들까지도 술에 빠져 사는 경우가 많아 가난한 집이 매우 많았다. 하지만 해방 이후 석면 광산이 문을 닫게 되면서 점차 술집이 사라졌고 마을 주민들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현재 대부분의 주민들이 논농사 또는 밭농사를 짓고 있으며, 여든이 넘은 주민들도 부지런히 일을 하는 등 가난과는 거리가 먼 살기 좋고 성실한 마을이 됐다.

마을 주민들은 서로 돈독하고 우애가 좋다. 노인회에서는 매월 두 차례 정기 회의를 갖고 있는데, 회의 날은 회관에 다함께 모여 점심을 먹는데 매번 잔칫날이나 진배없을 정도로 화목하다. 또 추석이 되면 해마다 귀성객들이 마을 회관을 빌려 다함께 놀며 친목을 도모하는 등 주민 간 다복하고 화합이 잘 되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버스노선이 없는 마을 특성상 마을택시를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호응이 크다. 또 도로가 신설되고 마을안길이 확장되는 등 마을 사업이 원만하게 운영돼 점차 교통이 편리한 마을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마을 인근에 위치한 광천원김과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등 1사 1촌 협력 모델로 자리매김 해 나가고 있다.

▲ 덕정마을 표지석과 마을 전경.

◇‘저그물’과 관련된 전설

덕정마을에는 ‘덕정(德井)’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있다. 우물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 나와 논밭의 곡식을 잘 자라게 해주는 큰 덕을 베풀어 주는 샘일 뿐 아니라, 피부병을 낫게 해주는 신비의 샘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가 인근에도 소문이 나면서 덕정에 모여드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날 한 아낙네가 마을의 어른을 찾아와 긴 이야기 끝에 자신은 5대 독자의 아낙네로서 결혼한 지 십 여 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어 마지막으로 덕정의 물에 목욕하고 덕정의 용신에게 빌어 소원을 이루고자 하니 덕정 근처에 움막을 짓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너무 간곡한 아낙네의 간청에 마을 어른은 곧 마을사람들의 뜻을 모아 언덕 위에 조그마한 움막을 짓도록 허락했다.

아낙네는 백번이고 허리를 굽혀 감사인사를 하며 언덕 위에 조그마한 움막을 지었고 새벽별을 보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덕정의 물을 한 대접 떠 놓고 정성을 다해 빌었다.

“덕정의 용왕님께 비나이다! 불쌍한 이 아낙을 돌보셔서 아들 하나 낳도록 헤아려 주시옵소서!”

아낙은 덕정의 물을 한 대접 들이켜고 물을 길어다 온몸을 깨끗이 닦아냈다. 이러한 행위는 깊은 밤까지 반복됐다. 또한 다른 주민들이 목욕을 할 때마다 정성스럽게 도와줘 피부병 치료에 앞장서서 덕을 베풀었고, 그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 등을 깨끗이 치워 덕정의 주위가 언제든지 티끌 하나 떨어뜨린 흔적이 없도록 마음을 다해 보살피며 소원을 기도했다. 이에 덕정은 전보다 훨씬 더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넘치게 됐다. 마을사람들은 그토록 정성으로 덕정을 보살피는 아낙에게 오히려 감사했다.

또한 아낙은 한낮에는 마을의 이집 저집을 드나들며 열심히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기도 했다. 또 이따금 찾아오는 남편을 맞을 때마다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푸짐한 잔치까지 베풀었다고 한다. 덕분에 아낙에 대한 칭찬은 마을에서 높아만 갔고, 덕정에 움막을 짓고 산 지 정확히 1년이 되던 날 아낙의 지극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드디어 임신을 했고 아들을 낳았다. 아낙은 그토록 정들었던 저그물마을을 떠났고, 이러한 전설을 갖고 있는 덕정은 그 후로도 여전히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내리게 됐다고 한다.

▲ 덕정마을회관.

◇독립운동가 서승태 선생의 마을

광천읍에서 유일한 독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서승태 선생은 상정리에서 비범하고 범상치 않은 인물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선생이 거의 매일 오고 다녔던 길은 백동마을에서 상지고개를 넘어가는 길로 상당히 고불고불 험난했는데 선생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호랑이가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한다. 이는 호랑이가 선생이 위험에 처할까 뒤를 보호해줬던 것이라고 주민들은 이야기한다.

덕정마을에는 과거 서승태 선생의 외손인 이흥구 씨가 살았으나 현재는 인근의 다른 마을로 이사했다. 이흥구 씨는 서승태 선생에 대한 각종 자료들과  증언을 오랜 기간 수집했고, 다음은 외손 이 씨가 직접 작성한 서승태 선생의 이야기다.

서승태 선생의 자는 성삼 혹은 일롱이며 1854년 8월 30일 충청도 홍주현 궁경면 상지마을, 현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에서 연산서씨 13대 손으로 탄생했다. 선생은 천성이 강직하고 호방해 불의를 보면 의기가 복받쳐 분개하는 마음이 강했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이 깊어 면학에 정진해 인근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았고, 선생의 학문은 홍주향교 도유사로 재직하며 유학과 신학문으로 넓혀갔다. 선생은 1905년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각지 유림을 비롯해 뜻깊은 우국지사들과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결사항진의 항일의거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1906년 병오 항일의거가 시작되면서 당시 이 지역의 민종식 의병장을 중심으로 합세해 의병활동에 협력했다. 민종식 의병장이 의병을 이끌고 남포 방면에서부터 홍주성을 향해 진군할 때 선생은 이 지방 부호가의 양곡 창고를 열어 의병장들에게 군량미를 제공함으로써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다. 이로 인해 일경의 체포령이 떨어져 은신하게 되며 자녀들의 고통이 심했고 넷째 아들 서홍모 씨가 체포돼 화성파출소로 연행돼 가기도 했다.

선생은 1907년 궁경면장으로 재직하며 지역의 평온과 질서 회복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고,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출하고자 대곡제도를 실시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 선생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는 길이 오직 신학문을 배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택(현 광천읍 덕정마을)에 영재배출을 목적으로 덕명학당을 열고 친구의 자녀, 유능소년들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며 한학과 신학, 선생이 직접 집필한 삼요론 등을 교육시켰다. 그 후 사제들을 모두 모아 현 광천읍 신진리에 600여 평의 교실을 건립했고, 1908년 3월경 사립 덕명학교 현판을 걸고 개교했다. 이는 덕명초등학교의 전신이며, 이후 오늘날까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선생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제자들과 박원식, 오이섭, 이명종, 최응모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태극기, 삼력병합설, 자유성 등 유인물 1600여 매를 등사해 광천 전 지역에 부착했고, 광천 장날을 이용해 옹암포에서부터 현 양촌 앞 상봉 앞 구장터 등지에서 만세를 선창하며 가로행진을 하다가 일경에 피체됐다. 이어 1919년 4월 28일 공주지방 검찰서에서 구속됐고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등으로 공주법원에서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일경의 갖은 악형과 고문으로 건강에 심한 치명상을 입고 악하돼 그해 12월 가출옥 됐으며, 일주일만인 12월 31일 자택에서 순절했다. 선생의 묘는 국립유공자 묘역에 있으며 저서로는 자유성, 삼요론, 삼력병합설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사립덕명학교 현판 및 교기가 현재 덕명 초 내에 전시돼 있다. (2009년 3월 외손 이흥구 작성)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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