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제 지내며 나루터로 배 드나들던 다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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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제 지내며 나루터로 배 드나들던 다진마을
  • 글=장윤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0.2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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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 <32>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광천읍 신진리 다진마을

광천읍 도로 따라 아파트와 단독주택 자리한 주거중심 마을
석면광산 노동자 합숙소·산제당·배 드나들던 나루터 전해져
각종 조직과 기구 통해 마을 발전과 단합 위해 힘쓰며 노력
투명 재정운영으로 장부 회관에 항상 공개… 주민신뢰 얻어

▲ 다진마을 전경.

◇다진마을 역사와 개관
광천읍 신진리 다진마을은 읍사무소에서 서쪽으로 장항선 철도를 건너 상지천 옆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신진1리, 서쪽으로는 상정리, 남쪽으로는 신진2리, 북쪽으로는 신촌마을과 접하고 있다. 백제시대에는 결기군에 속했고, 신라시대에는 결성군, 고려시대에는 홍주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홍주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다진리, 용두리, 신촌 및 한정리 일부를 병합해 신촌과 다진의 이름을 따 신진리라 해 홍성군 광천면에 편입됐다가 읍 승격에 따라 광천읍 신진리가 됐다. 신진리는 신진1·2리, 용두, 장현, 송우, 다진, 신촌 등 7개 행정마을로 구분된다. 현재 다진마을은 큰 도로를 따라 상가들이 자리해 있지만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들이 주로 자리한 주거 중심의 마을이다.

다진마을의 경우 일반 가옥과 함께 우주아파트도 자리하고 있어 220여 가구가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경열 이장이 어린 시절만 해도 300여 가구가 넘을 만큼 큰 마을이었으나, 광천읍의 인구 감소 등으로 점차 마을 주민도 줄어들게 됐다. 주거 중심의 마을이고 시내권에 위치해 있다 보니, 주거 및 교통이 편리한 것이 마을의 큰 장점이다.

▲ 다진마을회관 전경.

현재 마을회관은 마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데, 324평 부지에 현대식 건물로 잘 지어져 있다. 과거 광천 버스부 약장사집이라 하면 모든 이들이 알만큼 유명한 곳이었는데, 그 자리에 현재의 마을회관이 지어졌다. 현재는 홍성군에서 마을회관 진입로 포장 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공사가 마무리되면 보다 편리하게 회관 및 마을 진입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회관 앞 팔각정에는 평소 부녀회원들이나 노인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등 정이 넘치는 모습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다진마을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고구마 등 밭농사를 주로 짓고 있다. 최근에는 고령화로 인해 많은 주민들이 농사를 직접 짓기보다 타인에게 맡기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 다진마을회관에는 장부가 비치돼 있어 주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배연길 노인회장과 김영희 노인회 총무는 마을 재정관리를 꼼꼼히 하고 있는데, 주민들이 모은 기금 내역과 사용 내역을 깔끔히 정리해 회관에 항상 비치하고 있다. 원하는 주민이면 누구나 언제든 장부를 살펴보며 기금이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 집행하고 있다.

다진마을에서는 예로부터 당산제를 지내왔는데, 이를 증명하듯 산제당이라는 지명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 산제를 지내던 곳은 야산 개간으로 밭이 돼 더 이상 산제를 지내고 있지 않다. 당산제는 1968년경 중단됐는데 합숙소가 있었던 마을 뒤 당산에서 산신제를 지냈던 것이다. 일년 동안 마을의 무사와 평안을 기원하며 지낸 당산제는 정월 초이튿날 저녁, 마을주민 전체가 참가하는 주요 행사였다.

▲ 백용기 개발위원장과 서대순 부녀회장이 운영하는 신진정미소.

◇다진마을 합숙소와 당산제
다진마을은 오래 전부터 주택 지역으로 사람들이 살아왔기 때문에 묘소를 두지 않았다. 따라서 마을에 특별한 명당 터는 없다고 전해오지만, 오래 전 부자가 살았던 좋은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아주 오래 전 박 씨가 살았던 이 집터는 일제강점기에는 석면 광산 노동자들이 생활하던 합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제관으로는 당주 1명, 축관은 연임했다고 한다. 제를 지내는 비용은 공동부담을 원칙으로 했으며 대동회에서 결산을 했다고 한다. 제물은 생선전, 돼지고기, 떡, 삼색실과, 식혜, 직접 담근 술, 형편이 좋을 때는 통돼지도 사용했다고 한다.

다진마을은 예전에 마을까지 배가 들어왔으나, 언제까지 배가 들어왔는지는 추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주민들조차 나루터의 흔적을 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봐 한말 또는 이전인 조선 후기에 나루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안선이 낮은 옹암포가 번성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이기 때문에 다진마을의 포구는 더 이른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광천읍 신진리를 두르는 나지막한 야산줄기를 일부 주민들은 용의 형상으로 이야기하며, 다진마을은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장항선 철도와 도로가 용혈을 끊으려는 의도로 만들어져 이후 광천읍내, 특히 다진마을에 인물이나 부자가 나지 않게 됐다며 아쉬운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부녀회는 마을의 각종 행사지원, 자연정화활동, 봉사활동 등 마을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또 청년회는 마을행사 지원 및 마을 발전을 위한 노력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특히 방앗간을 운영하는 서대순 부녀회장과 백용기 개발위원장 부부가 합심해 마을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다진마을 조직 및 기구
다진마을에는 1979년부터 1999년까지 이어온 ‘아버지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50세 이상 주민 약 50여 명이 회원으로 구성돼 운영됐던 아버지회는 마을 청소년 선도와 각종 행사 협조, 회원 관광여행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매월 모임을 가졌으며, 월 회비는 5만원 씩 납부해 기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현재 아버지회는 사라졌지만, 청년회원 25명, 부녀회원 42명, 노인회원 26명 등 다양한 조직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노인회는 마을 노인들이 친목과 마을 행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조직이며 마을 대소사에 조언을 많이 하고 있다.

다진마을에서는 해마다 경로잔치와 효도관광을 번갈아 시행하고 있으며, 올해는 효도관광으로 마을 어르신들이 서천에 다녀오기도 했다.

◇다진마을의 용대기
다진마을은 광천읍내에서 제일 기가 셌던 마을이었다고 전해진다. 두레를 할 때 다진마을 용대기를 세워 놓으면 다진마을 용대기가 광천읍에서 제일 어른이라 해 인근 다른 마을 주민들이 자기 마을 용대기를 내리거나 뉘어 놓은 채 지나갔다고 한다.

현재 마을회관에 보관하고 있는 용대기는 1966년 10월 광천읍 주최 풍년제농악대회에서 우승 해 받은 것으로, 이전에 사용되던 더 오래된 용대기는 1966년 우승으로 소각했다고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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