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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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가는 길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6.11.0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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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잠자리를 뒤척이다 일어나보니 밖은 어느새 부슬비가 내린다. 새벽 네 시 반, 으스스한 몸으로 간단한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출발했다. 부산 소재 대학교에서 오전 실기 심사가 예정되어 있으므로 여섯시 첫차를 놓치면 낭패가 틀림없다. 다소 일찍 역사(驛舍)에 도착했을 즈음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도시는 아직도 잠에 취해 있지만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른 출근에 발길이 바쁘다. 나는 우산을 쓰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정확한 시간에 기차는 출발했고 사위(四圍)는 여전히 어둡다.

부산행 기차 여행은 항상 마음을 설레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방학을 이용하여 자주 여행을 다녔다. 당시에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비둘기호가 있었는데 자정 넘어 막차를 타면 동 트기 전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큼지막한 배낭을 메고 태종대에서 일출을 보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태종대에서 목포까지 남해안 섬 모두 방문하기’나 ‘태종대에서 속초까지 버스로 올라가기’같이 한 번 계획하면 족히 열흘 이상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한 번은 매물도에서 태풍에 갇혀 며칠을 옴짝달싹 못하기도 했고, 해금강변에서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유리 파편 같은 겨울 바닷바람을 맞으며 긴 밤을 견디기도 했다.

순천에서는 지역 깡패들이 운영하는 6000원짜리 여인숙에서 마음 졸이며 잠을 청하기도 했고, 용평에서는 노잣돈이 바닥나 발을 동동 구르다가 서울 번호판의 인심 좋은 아저씨를 만나 고급 승용차로 편안하게 귀가하기도 했다. 고단한 여행의 연속이었지만 역마살이 몇 개씩이나 끼어 있는 나는 새로운 방학이 다가올 때마다 상기된 마음으로 다시금 떠남을 계획하곤 했다. 

내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매년 한번은 반드시 다녀오는 지리산이었다. 내가 고된 산행을 중독자처럼 좋아했던 이유는 필연처럼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연과 다른 곳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지리산만의 진지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뱀사골에서 나만 알고 있는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늙은 비구니 스님이 있는 암자에 들러 하루를 묵었다. 갈 때마다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이 인심 좋은 시골 할머니 스님께 속세에서 가지고 온 88담배 몇 갑을 드리면 지난해 수확해 정성스레 말린 녹차를 한 봉지나 얻을 수 있었다. 산행을 하다가 지리산에서 훈련하고 있는 전문 산악인을 우연히 만나 며칠을 졸졸 따라 다니기도 했다. 나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그들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지리산의 은밀한 곳을 속속들이 데려가주기도 했고, 각 지역마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대해 풍부한 미사어구를 섞어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나는 히말라야에서 암벽을 타다 발을 헛디뎌 로프에 매달린 채로 몇 시간동안 구조대를 기다렸던 아찔한 이야기부터 지리산 절벽 외로이 서 있는 작은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은 한 여인의 기구한 사연까지 마음을 졸이며 경청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지는 숨이 턱턱 막히는 힘든 산행을 마무리하면 온 몸은 땀에 절어 고약한 냄새가 나기 일쑤였다. 해가 일찍 떨어지는 탓에 터질듯 고통스러운 허벅지를 움직여 재빨리 텐트를 치고 간단한 저녁을 지으면 그날 일과는 얼추 마무리 된다. 듬성듬성 자리 잡은 주변 야영자들과 찬거리를 나누어 먹곤 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만든 유일한 반찬인 찌개가 너무 형편없었기도 했지만, 댓병짜리 소주 하나만 있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지리산 특유의 인심도 한 몫 했기 때문이다.

산사람들과 술 몇 잔을 단숨에 들이키면 낮부터 이어진 고된 산행으로 욱신거리는 근육통이 마취되고 정신은 몽롱해진다. 그러면 나는 내가 지리산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들과 비로소 조우하게 된다. 그 어떤 세속의 향도 첨가되지 않은 신선한 나무 냄새를 만나고, 빨치산 희생자들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는 잔인한 석양을 만나고, 백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풀벌레 소리를 만나고, 필경 누구에겐가 한 번쯤은 스치고 왔음에도 나에게만큼은 아무 말 없이 새침하게 사라져버리는 바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을 만나면 나는 그윽한 정신으로 그날의 피로를 잊고 긴 무아지경의 지리산 마법에 빠지곤 했다.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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