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릇이 문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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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릇이 문제이니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6.12.2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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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 속편을 보면 배우를 ‘노릇바치’로 무대를 ‘노릇하러 못는(모이는)데’로 풀이하고 있다. ‘~바치’는 ‘~이라는 직책 또는 직분을 맡아서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바치’는 ‘~아치’와 같은 계열의 어휘일시 분명하다. 왜냐면 무슨 무슨 아치나 어떠어떤 바치는 몽골어 ‘달로아치’와 무관하지 않은 까닭이다. 즉, 고려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에 6차에 걸친 침탈을 당한 뒤, 원나라의 부마국(사위 나라)이 된 25대 충렬왕 이후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고 관리들을 감독하던 직책에 ‘달로하치’란 명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부르기 쉽게 ‘ㅎ’이 탈락되어 ‘달로아치’로 발음되더니 이 말에서 ‘벼슬아치’따위의 단어가 생기고, 거기서 다시 ‘장사아치’ 가 ‘장사치’로 편리하게 축약되더니 마침내는 ‘양아치’같은 비속어까지 낳기에 이른다. 왜 이런 언어의 변천사가 생기게 된 것일까?

언어란 주지하다시피 탄생→성장→사멸의 과정을 거치는 모든 유기체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변천과정 속에서 언어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요컨대, ‘~아치’가 ‘양아치’라는 아름답지 못한 언어까지 만들어낸 이면에는 그 옛날 몽고인들과 그들이 세운 원나라에 대한 고려인들의 불신과 반발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주는 것이다.

다시 ‘노릇’이라는 순 우리말로 돌아가 보자. 큰 기대를 걸고 대학에 들어간 새내기들은 선배답지 못한 선배가 설칠 경우, ‘선배노릇이나 잘 할 것이지!’라고 속으로 불만을 품을지도 모른다. 친한 친구 사이라도 아래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다면 순전히 농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으리라. 왜나면 ‘노릇’을 제대로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봐! 애비 노릇 잘 하고 있는거야?”
“예끼! 이사람! 남 걱정하려 말고 지아비 노릇이나 제대로 하게!”
웃을 일이 아니다. 형 노릇 제대로 하기도 어렵고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삼강오륜이 별 것이랴! 왕은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할 때,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우며, 남편은 남편다운 삶을 살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할 때, 세상은 바로서고 살만한 환경이 마련되기 마련이다.

영국의 위대한 과학자 러더포드는 선생노릇에 신명을 다 바쳤기에 본인은 물론이고 여러 제자들까지도 노벨상을 받도록 이끌었다. 삼봉 정도전의 구상에 따라 신하들이 중심이 된 나라 근세조선을 지탱했던 핵심은 이른바 ‘삼사(三,司)’로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비롯한 언관과 역사의 기초가 되는 실록 기록을 담당했던 사관들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역사를 적어나갔고 언로를 지켰다. 이러한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던 시절은 관리들이 관리 노릇을 제대로 했던 시절이었다.

그 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개국공신의 후손들인 이른바, 훈구파와 신진사류들이 주축이 된 사림파간의 대립을 거쳐 선조 8년에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생기면서 거의 모든 관리와 유림들이 당쟁에 휘말리게 되고, 마침내 조선의 식자층은 관리와 선비로서의 ‘도리’와 ‘노릇’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기에 이른다. 이 틈을 비집고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한론과 이를 승계한 명치유신의 주역들을 앞세운 무리들에 의해 조선은 패망의 길로 내몰리게 된다. 역사는 말한다. 외침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홍이라고. 이 명언대로 조선은 먼저 스스로 무너졌고 일제는 생각보다 쉽게 조선을 삼켜 버렸다.

요즘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현실을 놓고 뜻있는 국민들은 저마다 묘수풀이라도 하듯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이미지를 일신시킬 갖가지 방안들을 찾기에 골몰할 줄 안다.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표출된 촛불집회는 우리 국민이 민의를 나타낸 위대한 또 다른 방식의 민주주의이자 대의정치를 보완해주는 진일보한 정치적 행위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과 대의정치의 골간을 담당하는 국회의원들을 볼 때 우리 국민들은 그들을 전폭적으로 믿기는 커녕 한숨부터 쉬지 않을까?

뭐랄까? 그들 모두 각자가 할 역할, 즉, ‘노릇’을 당최 제대로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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