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장 보기 위한 행렬 새벽 불 밝히던 가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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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장 보기 위한 행렬 새벽 불 밝히던 가정마을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7.01.23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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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45>
농촌마을의 위기 극복한 희망스토리를 만나다 - 광천읍 가정리 가정마을
▲ 가정마을 주민들이 지난 6일 김석환 군수 방문 당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 이전 무덤군 존재 추정… 천 년 전부터 사람 거주
한국전쟁의 아픔 크게 겪어… 명절이면 안녕과 풍요 기원해
광천장 오가던 길목으로 사람과 마소 북적이던 주막 발달해
담배농사·벼농사 짓는 농촌마을로 주민 화합과 단합 이뤄져

■가정마을의 개관과 역사

광천읍 가정리 가정마을은 가정리의 2개 행정리(가정, 시곡)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결성군 광천면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시곡리·가곡리·장석리·조정리·응암리의 일부를 병합해 가곡과 조정의 이름을 따 가정리라 해 홍성군 광천읍에 편입됐다. 가정리는 가정과 시곡 2개 행정리로 구분됐다. 동쪽에서 남서쪽과 북서쪽으로 뻗은 두 개의 산줄기 사이 고랑에 마을이 자리잡은 형국으로 큰말·양지말·두물·진두리·구룡목 다섯 개 마을이 산 아래에 둥글게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이 큰 고랑은 이른바 ‘한배미들’이라 하는데, 넓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논 즉, 한배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정에는 정자나무 고목이 큰말과 양지말에 각각 두 그루가 있었는데, 이중 큰말 고목은 2000년경 벼락을 맞아 고사했고 양지말 고목은 남아있다. 가정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는 장곡에서 광천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광천장을 보러가는 사람들이 봄티고개에서 감골고개로 걸어 다녀 전통시대에는 장이 서는 날마다 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 가정마을회관 전경.

■천 년 전부터 사람 살던 가정마을
‘비선재골’은 비가 서 있다는 뜻의 지명으로 선 돌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세집매 강태환씨 집 뒷 고랑에 선돌이 있고 구룡목에도 비슷한 바위가 있어 아이들의 놀이터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선돌이 선사시대 유물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주민들이 ‘선돌’이라 부르고 그것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주목된다. 양짓말 구룡목에서 대규모 고분군이 발견돼 이와 관련된 흔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구룡목의 고분군은 표고 77m 야산 남향사면에 폭넓게 분포돼 있다. 지금은 하단부 일부가 밭으로 개간되고 대부분이 산림이며 일부 민묘도 조성돼 있어 고분의 명확한 모습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곳 고분은 돌판을 사방으로 두른 석곽묘였고 작은 토기가 다량으로 발견됐다는 것으로 봐 고려시대 이전의 무덤군으로 추정된다. 가정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천 년이 더 됐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마을회관 뒤편의 비선재골 안쪽 깊숙한 곳에는 절터가 있다. 현재 논·밭으로 개간돼 원형을 찾아볼 수 없지만 절터 북쪽에 작은 방죽이 남아있어 절과 관련된 시설로 추측되고 있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잡목이 빽빽했으나 평평하게 구획돼 있고 기와조각이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한다. 100여 년 전에도 이와 같은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며 절터로 추정되는 지역에서는 수 십 년간의 경작으로 인해 어떤 유물도 찾아보기 어렵다. 세집매에서 가래실로 가는 길목은 표고 50m 정도의 낮은 야산지대인데 옹기를 굽던 요지가 있었다. 마을 노인도 요지가 살아있던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으로 봐 일제강점기 이전에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옹암리 석포 포구에서 홍주 일대로 물산이 보급됐던 것을 유의하면 이곳에서 옹기를 구워 곧장 광천에서 소비됐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은 밭으로 개간돼 요지 형태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주변에 많은 옹기 편과 불탄 흙이 산포돼 있다.

▲ 가정마을의 풍경.

■한국전쟁 시기와 가정마을의 전통
한국전쟁은 민족 정서를 갈라놨는데, 친인척처럼 살아오던 이웃이 좌우익 갈등으로 원한관계가 돼 버리고, 이웃이 좌우익 갈등으로 원한관계가 되는 등 수 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옛 일을 입에 담지 못할 만큼 끔찍한 기억이 됐다. 가정마을에서도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이 있어 힘든 시기를 보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좌익, 우익 등 사상이 있지 않았고 그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기였기에 북한군이 장악할 땐 북한군이 시키는 대로 하고, 반대 상황이 되면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마을 큰 길을 따라 북한군이 들어왔을 때 초라한 행색의 군인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소연 할 때 밥을 지어줬다가 훗날 빨갱이 짓을 했다며 끌려가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여러 사람과 함께 산속에 끌려가 총질을 당했는데, 다행히 총알 세례를 피해 시체들 사이에서 죽은 척을 하다 벌거벗은 채 돌아왔다고 한다. 주민들은 오서산을 넘어 피난을 떠났다가 무사히 돌아오기도 했다.

가정마을은 명절이면 동네 풍물패가 걸립을 다니며 각 가정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다. 풍물패가 집안 곳곳을 돌고 특히 우물에서 신나게 풍장을 치고 나면, 집에서는 약간의 기부금을 마을에 내놓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 이어지던 전통이었지만, 지금은 인구가 줄고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며 행해지지 않고 있다.

정월보름에는 개인적으로 거리제를 지내며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많았다. 마을 앞길이 큰 도로라 다니는 사람이 많아 사고를 방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동네사람 전부가 참여하는 제의는 없었다고 한다. 방앗간이 없어 큰 나무에 멧돌 두 개를 돌리거나 절구통에 보리방아를 찧었다. 소가 돌리는 방아도 있었다.
한편, 지대가 높은 마을인데다 하천이 없어 냇가가 없기 때문에 우물은 매우 중요한 식수원이었고, 동네 여인들은 우물 주변에 모여 빨래를 했다. 진두리와 양짓말 들 가운데 샘이 있었고, 큰 말에 공동우물이 있어 여러 사람이 애용했지만 경지정리 후에 없어졌다. 고지대여서 오염원이 없으므로 물이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 가정마을에 자리잡은 느티나무와 뒷산.

■광천장 오가던 길목에 자리한 가정마을
예나 지금이나 광천장은 서해안 내포 일대에서 손꼽히는 큰 규모의 장이다. 시장의 규모는 도시화가 진행되고 교통이 편리해진 2~30년 전부터 크게 축소됐는데, 덕분에 광천읍내 주변 지역은 광천장을 보기 위해 이동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다. 가정마을은 장곡 쪽에서 광천으로 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옛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 현재도 그대로 큰 길이 돼 봄티고개에서 감골고개를 잇고 있다.

광천장에서는 못 사는 게 없다고 할 정도여서 소를 끌고 와 수레에 큰 장롱을 사들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 모이는 곳에 쉼터가 있기 마련이어서 길가엔 주막이 줄지어 있었는데 특히 감골에서 가정까지가 주막이 많기로 소문났었다고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끌고 오는 소에게 물과 여물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주막에는 사람과 우마로 북적였다고 한다. 장이 열리는 날이면 장곡, 청양 쪽에서 독배장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걸어오는 사람들로 먼데서 보면 불빛이 줄줄이 깜박이는 광경을 마을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가정마을은 대부분 주민이 벼농사를 짓고 있다. 50여 년 전부터 시작된 담배농사가 크게 부흥해 고 박양옥 씨가 담배연초조합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가정마을에 56가구가 살고 인구도 많아 특수작물 재배도 가능했다고 한다. 1990년대가 가장 전성기로 주민 반 이상이 담배를 키웠다. 그런데 담배 농사가 워낙 고된 일이라 젊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며 종사자도 점차 줄어들게 됐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진행되기 전까지 벼농사는 물이 귀해서 쉽지 않았지만 관정공사를 한 후부터 골짜기 안쪽까지 일구고 있다.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는 함석집이 가장 좋은 집이라는 인식이 퍼져 대부분 가정이 빠른 시기에 함석지붕으로 교체했다. 여느 마을처럼 길도 넓히고 울타리와 화장실을 신식으로 바꾸는 등 수년간 매우 바쁘게 살았다.

가정마을은 지대가 높은 편이라 홍수 피해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반대로 늘 물 부족에 시달렸다. 논에 모내기를 포기하고 콩을 심는 해도 부지기수였는데, 1978년 처음 지하수 공사를 한 이후로 비로소 물 걱정을 덜었다. 한편 마을회관과 양짓말 사이가 산으로 막혀 있었는데, 1995년 경지정리를 하면서 산을 밀고 논을 만들었다.

▲ 가정마을 주민들은 지난 6일 홍성사랑장학금을 기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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