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로 독배의 번창이 재현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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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로 독배의 번창이 재현 되기를
  • 편집국
  • 승인 2008.09.1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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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과의 대화 - 김종관 이장과 나눠보는 상하옹 마을이야기

토굴새우젓과 김으로 유명한 광천. 그리고 그 옛날 광천에서 번창과 영화를 누렸던 마을 독배마을. 광천과 보령을 이어주는 21번 국도변에 자리잡은 마을로 상가들이 많이 눈에 띄지만 한가롭기만 하다. 광천의 새우젓의 산지인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 옹암리이지만 지금도 독배라고 많이 부른다. 마을 뒤 당산에는 암반을 파 들어간 토굴이 30여개가 있다.
독배는 일제 때만 하여도 충청남도의 가장 큰 시장인 광천시장의 관문으로써 안면도를 비롯한 서해안 도서의 오직 하나의 숨통이었다. 그래서 4일과 9일의 장날에는 백50여 척의 어선과 장배가 드나들며 크게 번영을 누렸던 포구였으나 선창이 위에서 사태로 흘러 내려오는 흙으로 인하여 매몰됨에 따라 자연 쇠퇴해간 포구다. 마을이 항아리 모양과 비숫하다 해서 독배라 부른다.
또한 여객선이 있어서 안면도, 원산도, 효자도, 오천으로 다녔으나 역시 포구가 흙으로 메워짐에 따라 오천 포구로 옮겨갔다.
문헌에 따르면 백제 때는 결기군, 신라 때는 결성군에 속했다가 고려 때는 보령현에 속했었다. 조선 초엽엔 보령군, 말엽엔 보령군 청소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청촌, 양촌, 음촌, 석포리 일부를 병합하여 옹암리라 하고 홍성군 광천면에 편입되었다.

▶김종관 이장과의 대화
일제 강점기 때에는 천안에서 장항까지의 소금, 쌀 등이 옹암포로 다 모아서 일본으로 실어갔다. 그때는 굉장히 번창했고 부자들도 많았다. 시골은 생선 한 마리 먹기 힘들던 시절이었는데 이곳은 흔하게 먹을 수 있었고 200호도 넘게 살아 사람도 많았고 모든 것이 항상 풍족했다.
그런데 대천, 군산, 인천 등에 항구가 생겨나고 독배는 사금 캐는 배가 휘젖고 다녀 퇴적물이 쌓이면서 70년대 중반부터는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됐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점점 떠나고 퇴보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140여가구에 400여명의 인구가 되는데 토굴새우젓 때문에 젊은이들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최근 물길을 트는 뱃길사업을 한다고 들었는데 주민들은 아직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큰 기대를 안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현실성이 없는 사업이고 관광객 유치가 어느 정도가 될지도 미지수이며 주민들과 상인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도 확실치 않다. 그 예산으로 먹거리타운을 이 곳에 조성하고 관광객들이 모일 수 있는 거리러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농사 짓는 분들에게는 큰 피해를 주게 될 것이므로 신중하고 먼 미래를 내다보는 계획이 되길 빈다.
이번에 재개발 신청을 했는데 올12월 말까지 사업시행 여부가 결정된다. 제발 채택이 돼서 계획도시가 됐으면 좋겠다. 마을 한가운데에 상설 새우젓 축제장을 만들어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고 도로변 생우젓 상가들에게 지원을 해줘 더 깨끗하고 시대에 맞는 가게로 탈바꿈해 경쟁력 있는 상권으로 바뀌기를 염원한다.
우리 마을은 1년에 한번씩 대동회를 열고 음력 정월 초엿새날 당제를 연다. 당제는 옛날 어선들의 무사항해를 빌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마을의 무사태평과 안녕,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제일 큰 축제이고 주민들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행사이다.
농업보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많다보니 이장의 역할이 농사를 짓는 마을보다는 적은 것 같다.
그 동안 마을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하신 분들이 너무 많다. 이번 기회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앞으로도 관심과 협조 부탁드리며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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