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제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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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제일에
  • 정복동
  • 승인 2017.08.0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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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막내 딸 복동이어요. 아버지! 많이 불러보고 싶었던 아버지. 무릎에 어리광도 부리고 싶어요. 어려서 학교에 다닐 때 동무들이 지네들 아버지가 동화책을 사왔느니 예쁜 옷이며 인형이며 학용품이며 맛있는 과자도 사왔다고 서로 자랑을 하면 얼마나 부러웠던지 돌아서서 울었어요. 길을 가다 자기 아버지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너는 참 복도 많다’, ‘나는 언제 저렇게 해 보나’하고 한탄도 했었답니다.

 어머니한테 나는 왜 아버지가 안계시냐고 투덜대면 “명이 그만인 것을 어찌하겠냐”며 “그래도 너는 아버지한테 귀염둥이였다”고 하셨습니다. 너의 오빠나 언니는 별로 관심도 없었던 것 같이 하셨는데 막내라 그런지 너는 유독 안아도 주시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시고 뽀뽀도 해 주시며 예뻐하셨다고 달래 주셨어요. 그렇게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던 어린 막내둥이를 남겨두고 못 오실 곳으로 떠나신 아버지를 철부지인 못난 딸은 원망을 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를 낳아주시고 살게 해 주신 아버지, 어머니. 그 감사함을 진작 알면서도 모른 체 했어요. 해마다 돌아오는 아버지 제사상 앞에서 이제야 고백을 하니까요. 제 나이 팔십이 넘어서야 철이 조금 드나 봅니다. 저도 어미라는 칭호를 받으니 더욱 그리워지네요. ‘있을 때 잘하라’는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어머니는 그 지독한 가난 속에서 우리 사남매를 길쌈으로 성장시켜주셨는데 생전에 효 한 번 못하고 잘못을 경계말씀 하시면 나만이 제일인 양 반항을 했어요. 아비 없는 사남매 잘 되라고 청수를 떠 놓고 기도하는 어머니한테 그게 미신이라고 얼마나 반대를 했는지 해도 해도 끝없는 반성이 되네요.

큰오빠가 아버지 몫을 다 했어요. 다달이 나오는 월사금을 다 내주고 뚜껑 없는 꽁보리밥 도시락이라도 거르지 않고 꼭꼭 싸줘서 국민학교를 졸업시켜 주셨어요. 그 시절에 아버지가 있고 우리보다 잘 살아도 국졸 못한 사람이 많은데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제가 태어난 고향은 아버지께서 평생 실으셨던 금산군 복수면 구만이 아담한 작은 마을이어요. 대동아 전쟁이 한참이던 왜정 말엽에 일본 사람들은 내손으로 힘들여 농사지은 곡식을 공출로 다 뺏어가고 콩깻묵이나 배급을 주고 농촌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하니 다 팽개치고 대전으로 이사를 했어요. 대전으로 이사를 해서 두 오빠가 취직을 해서 돈을 버니까 조그마한 집도 사고 큰 오빠는 결혼도 했어요.

어머니께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늘 강조를 하셨는데 제 나이 열 살이 되었는데도 입학통지가 안 나와서 면사무소에 가 보니 제 호적이 없었어요. 왠지 아세요?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데 면사무소가 너무 멀어 구장한테 부탁을 했다면서요. 구장님이 깜빡하고 출생신고를 안했대요. 그 후 아버지가 세상을 뜨시니까 사망신고를 했대요. 그런 줄도 모르고 십년 후에야 알았으니 저는 호적이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오빠가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대전 산성국민학교 부속학교가 있는데 입학통지서가 없고 나이가 좀 많아도 받아준다고 해서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됐어요. 어머니 손을 잡고가 봤더니 선생님은 네 분이시고 교장선생님은 일본사람인데 산성국민학교 본교에 계신대요. 일 년에 두 세 번 밖에 안 오신대요. 학교라야 창고 같은 건물이 세 채뿐이고 사무실과 큰 집 마당 만 한 운동장이 있었죠.

교실에 들어가 보니 책상과 걸상도 없고 바닥은 송판을 깔았어요. 땡땡 종소리가 나고 선생님이 들어오시니까 오빠같이 키 큰 학생이 일본 말로 뭐라고 하며 일어나서 선생님한테 인사를 했어요. 인사를 하고 다들 앉기에 나도 앉았어요. 선생님은 다행히 우리나라 사람이어서 우리말로 나를 오라고 하시기에 이 학생의 이름은 ‘데이후꾸로’라고 소개를 시켜주며 앞으로 일본 말 배워서 일본 말 써야지 조선 말 많이 쓰면 화장실 청소 시킨다고 하셨는데 집에서는 일본 말 안 쓰고 가르쳐주지도 않으니까 화장실 청소는 제가 맡아 놓고 했지요.

또 친구들은 거의가 창씨개명을 해 ‘가네모도상’, ‘다까다상’,  ‘야마모도상’이라고 성씨가 한문으로 두 자인데 저는 오빠가 완고해서 성씨를 안 바꿨어요. 그때는 성씨를 두자 가진 애들이 부러웠어요. 아버지한테 지나간 일을 말씀드리다니 옛 생각이 주마등같이 지나가네요. 3학년이 되어 ‘히라가나’와 ‘가다카나’를 배우기 시작하고 일본말로 친구들과 겨우 소통할 수 있었는데 1945년 8월 15일 지긋지긋한 일본 협박에서 풀려나 우리 말 우리 글 마음 놓고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해방이 찾아왔어요. 해방 후 일본 학생들 공부하던 학교가 비워지니까 산성 부속학교 책상도 걸상도 없이 공부하던 우리가 그 학교로 들어갔어요. 맡아 놓고 하던 화장실 청소도 순번 따라 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데 물자가 없으니 처음에는 책도 없이 칠판에다가 ㄱㄴㄷㄹ 부터 배우고 구구단도 2×2=4로 바꾸고 친구들 이름도 김 아무개 이 아무개로 고쳐 부르려니 혼동이 됐지요.

저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오빠한테서 국어를 배운 것이 있으니 해방 이후에 공부를 제법 했어요. 시험을 본다 하면 신이 났었어요. 학교에서 일제고사라고 국어, 산수, 자연, 도덕에 관한 시험인데 학년 전체에서 3~4등을 했거든요. 이렇게 대전 선화국민학교 제2회로 졸업을 했는데 그때까지 호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17살 때에 6·25 사변이 일어났는데 면사무소가 다 타서 새로 문서작성을 하느라고 인구조사 할 때 제 호적이 만들어져서 이렇게 이름 석 자 붙이고 살고 있어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왜 어렸을 적 힘들었던 말씀을 올리느냐면요, 아버지가 계셨으면 남부럽지 않았을 시절이기에 나이를 먹을 대로 먹고 나니 아버지 그리운 생각이 사무치기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젊었을 때 나물죽에 꽁보리밥으로도 고픈 배를 못 채우셨으리라 생각되는데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한테 손 모아 정성들여서 맛있는 음식 많이 차려놓고 고백을 하니 마음이 후련해집니다.

정복동<홍성도서관 문예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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