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대 신도시와 대조되는 목가적인 전원 풍경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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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대 신도시와 대조되는 목가적인 전원 풍경 연출
  • 취재=허성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7.08.1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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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13> 홍북읍 대동리 동방송마을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함게 자리잡은 동방송 마을회관.

홍성군 홍북읍 읍소재지인 대동리는 2개의 자연부락이 결합된 지명이다. 대지리와 동방송리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각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 대동리가 되었다. ‘홍주대관’(홍주대관편찬위원회)의 마을 이름에 대한 유래를 보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 근원을 찾고 있다. 조선 말엽 홍주군 치사면 지역으로서 동방리(東方里), 갈산리(渴山里), 大池里(대지리)의 각 일부를 병합, 대지와 동방의 이름을 따서 대동리(大同里)라 하여 홍성군 홍북면에 편입되었다.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2그루가 양쪽에서 마을회관을 감싸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동방송마을의 집들은 왕복 2차선 홍북로가 관통하면서 양분된 형태로 흩어져 있다. 낙농업에 종사하는 농가에 사일로가 보인다.

■일제 때 면사무소 있었다는 주장도
그때는 3개의 마을이 합쳐진 것으로 돼 있으나 지금 대동리는 동방송과 대지리로 나눠진 자연부락이다. 내포신도시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최근 홍북면이 갑작스럽게 읍 승격이 이뤄졌지만 막상 읍사무소가 있는 대동리는 여전히 한가하고 조용한 농촌의 풍경이다. 읍사무소와 100m 정도의 거리로 떨어져 있는 동방송마을은 대동리를 구성하는 양대 축 가운데 하나지만 활기를 찾아보기 힘든 퇴락한 농촌 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동방송에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었다며 김경신 동방송이장이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줬다.

“왜정시대에 우리 마을에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방송리에 금광이 생기면서 면사무소와 지서를 대지리 마을로 옮겨갔다고 어른들이 전합니다.”

금광이 나올 정도면 꽤 유명한 광산으로 이름을 떨쳤을 텐데 기대만큼 금이 나오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이 마을이 금과 관련해 널리 인구에 회자된 적은 없었다. 기자는 막장이나 금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생긴 잡석 무더기 등의 흔적이 남아 있느냐고 물었지만 김 이장은 폐광하면서 막장을 메워 버린 것으로 안다면서 동네 가운데 위치만 가리켰다. 그 자신도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 금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그의 말에서 일제강점기 때 면사무소가 동방송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하는 미련과 아쉬움을 엿볼 수 있었다. 동방송리는 주민들 사이에서 ‘동방실’ 혹은 ‘동방리’라고 불리워지기도 하는데 다소 높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위 사방이 낮은 평야지대다. 그러나 서쪽 평야는 최근 너무 많이 변했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용봉산 사이의 넓은 벌판이 초록의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사라져 버리고 고층 아파트단지가 들어왔다.

 

김경신 이장이 홍북로에서 마을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낡은 창고 주변의 밭은 거의가 과거 사람이 살았던 집터다.


■과거 나주 김 씨 집성촌
동방송 마을에서 바라다 보이는 내포신도시는 전혀 딴 세상이다.
“지금 40여 호에 주민은 100여 명 삽니다. 그중 65세 이상 노인들이 절반을 차지하죠.”
김경신 이장의 말이다. 한때 70호가 살던 마을로 나주 김 씨 집성촌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대지리 마을이 청주 한 씨 집성촌으로 양대 가문이 쌍벽을 이뤘을 정도였으나 이농과 타 성씨들의 이주로 지금은 여러 성 씨가 어울려 사는 동네가 됐다고 했다.

동방송은 크고 낮은 언덕을 따라 집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어 초록색 숲이나 밭 가운데 듬성듬성한 형태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물론 마을에 사람이 많고 활기가 넘쳤던 시기에는 담장을 경계로 삼아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였으나 한 집 두 집 이사를 가고 떠나면서 동네의 그림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김경신 이장이 마을회관에서 여러 집들 사이에 밭을 여러 군데 가리키며 원래 집이 있었던 자리라고 말했다. 마을회관 인근에는 오래 전 폐가가 된 듯한 빈 집이 한 채 눈에 띄기도 했다. 부모들이 세상을 떠난 후 자녀들이 정리를 하지 않으면 쓰러질 듯 흉흉한 분위기로 방치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경신 이장은 마을에 혼자 살거나 요양원에 갈 준비를 하는 어르신들이 많아 10년 후에는 더 많이 늘어날 빈집을 걱정했다.

“노인들이 돌아가시거나 요양원에 입원하면서 빈집이 생기면 마을 분위기가 썰렁해집니다. 자식들이 빈집 처리를 해야 하는데 아무나 손을 댈 수 없죠.”

대개 부모님이 별세한 후 빈집이 생기면 자녀가 돌아와서 살겠다고 팔지 않거나 집을 정리하든가 둘 중의 하나다. 1년에 한두 번 명절에 고향에 찾아와 지낼 수 있도록 부모님 집을 그대로 놔두기도 하는데 수시로 관리하지 않으면 흉가가 되기 때문에 김 이장은 귀농·귀촌자 등 필요한 사람에게 맡겨 집도 살리고 농촌도 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마을에서 내포신도시가 내려다보인다.


■영농후계자 없어 미래 걱정돼
바로 건너 도청이 이전하면서 대도시가 들어와도 신도시 경계 밖에 있는 동방송마을은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외지인이 한 사람 들어온 것 외에는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 그대로다.
“땅값은 조금 오른 모양입니다. 공시지가가 오르니 세금만 많이 올랐지. 좋긴 뭐가 좋아…!”

게다가 오랫동안 낙농에 종사했던 주민들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신도시 입주민들로부터 축산분뇨가 심해 창을 열 수 없다는 민원을 제기 받고 농가의 주 수입원이었던 낙농을 접거나 악취 저감을 위한 장치를 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이다. 평생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김경신 이장도 낙농을 접었다고 했다.

“저는 60 평생을 동방송에서 살며 낙농에 종사하다가 3년 전에 접었습니다. 많을 때는 60~70마리의 젖소를 길렀지요. 축산분뇨 때문에 낙농은 법의 제약을 많이 받습니다. 내포신도시 이주민들이 축산분뇨 냄새 때문에 많이 괴로워하며 민원을 제기했고, 그래서 그만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꼭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안 좋아 그만뒀습니다. 원래 환갑인 올해까지 하려고 하다가 3년 앞당겨 빨리 접었습니다. 제가 할 때는 축산분뇨 냄새를 잘 몰랐는데 접고 나니까 다른 사람이 느끼는 불쾌감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낙농은 다른 곳으로 이전해서 하기도 힘 들다고 한다. 우선 주민들의 동의를 받기가 쉽지 않고 자녀들 가운데 대를 이어 할 사람이 없으면 폐농으로 이어져 국산 우유 생산량이 감축되는 등 영향이 미치게 된다. 동방송마을은 노인들이 쌀과 채소, 고추, 땅콩, 완두콩, 호박, 단호박 등 자급자족할 정도의 농사만 짓고 있다. 가업을 잇는 영농후계자도 많지 않아 김 이장은 마을의 미래를 걱정했다. 이번에 읍 승격과 함께 초대 명예 홍북읍장으로 추대된 이항진 재경홍북향우회장이 동방송마을 출신이다.

 

동방송마을 들판 너머로 초현대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영우 노인회장(왼쪽)과 김경신 이장.


수해 물 걱정 없는 우리 마을
<김경신 동방송마을 이장>

“올해 봄 가뭄이 심했지만 우리 마을은 물 걱정이 없었습니다. 논농사는 예당저수지에서 물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져 가뭄에도 잘 견뎌냈습니다. 다만 밭농사는 망쳤죠. 올해 봄철 밭농사는 가뭄을 많이 타 반수확만 했을 뿐입니다.”
김경신 이장은 동방송에서 60 평생 사는 동안 장마나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입어본 적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1987년도에 엄청나게 비가 온 적이 있었지만 논둑이 무너지는 정도였지 배수가 잘 돼 침수된 적은 없어요.”
김 이장은 천안에서 고교에 다니기 위해 잠시 고향을 떠난 것 외에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동방송마을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동방송마을노인회 창립 산파역할
<이영우 동방송마을이장>

동방송마을 이영우(80) 노인회장은 뜻밖에 원주민이 아니다. 동방송마을 주민으로 전입신고한지 불과 20년밖에 안 된 외지인 출신으로 지난해 노인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1997년 서울을 떠나 낯선 동방송마을에 내려왔다. 당시 서울에 살던 집을 재건축하고 있었던 그는 IMF환란을 맞아 건축업자가 어려움을 당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자 잠시 시골에 머물 곳을 찾던 중 충남 홍성에 빈 집을 하나 발견하고 곧장 이사를 했다. 주택 재건축 문제가 수습되면 2년 정도 지내다가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그만 그대로 눌러앉고 말았다.

그가 처음 동방송마을에 왔을 때 노인들은 많았으나 노인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나이 60으로 막 노년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던 서울노인은 노인회 창립에 앞장섰다. 결국 이듬해 1998년 동방송노인회를 결성했고, 산파 역할을 했던 서울노인은 총무로 추대받았다. 그 후 18년이 지난 2016년에 회장으로 추대됐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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