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단상(晩秋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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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단상(晩秋斷想)
  • 한학수 칼럼위원
  • 승인 2017.11.0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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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고 한다. 사물이나 사건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셈이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인지 되물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내면의 진화’가 일어난다.

삶에서 ‘행복’의 덕목은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가을색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과 비어가는 들녘에 완연하다. 이 모든 걸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어느 때보다 지금 행복하다.

왔다 갈 삶을 생각한다면 자연 그대로를 유지 보존하는 것이 자연의 품 안에 사는 사람의 도리일 테다. 우리는 다행히 봄·여름·가을마다 찬란했던 낱낱의 잎사귀가 무심히 떨어지는 멋진 자태를 시인처럼 볼 수 있는 나라에서 살아간다. 행운이다. 설령 사소한 곳일지라도 그대만의 가을정취를 느껴보라. 홀연히 걸으면 어떤가. 곰곰 생각에 잠기면 낳고 기르신 부모님, 엇나가지 않도록 가르쳐주신 선생님, 힘들 때 어깨를 빌려준 친구의 모습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가을색은 추억을 연상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그런 능력을 ‘창의성’이라고도 부른다. 기존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 매력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봄은 연초록이 절정에 이를 때 상춘객을 부르지만 가을은 다채로운 색깔로 자태를 뽐낸다. 자연의 순리가 그러하듯이 사람도 모름지기 변화에 무딘데다 행동이 굼뜨면 시대변화에 뒤떨어진 초췌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보게 된다. 뚜렷한 이유는 강력한 행동을 낳는다. 자연을 향해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먼저 자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낸 시스템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유를 통해 적극적으로 해법을 찾고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진 말자. 피에르 쌍소가 말하듯이 “외부에서 강요된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는 게 느림이며,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구석구석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현대인은 끝이 안 보이는 일 더미 속에서 사는 모습이 다반사다. 번잡함에서 떨어져 나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하루에 오는 수많은 메일 중에 답장해야 할 메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정보의 과잉 속에서 판단력이 없으면 뇌를 빌려주고 빈 머리로 멍 때리는 경우와 다름없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한 권당 600페이지가 넘는 총 4권 분량의 긴 책이다. 어떤 이는 평생 가도 못 읽을 테고, 다른 이는 ‘재밌다’고 또 읽을 수도 있다. 매사에 방법론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사에 선택과 판단을 강요받는다. 개혁을 외치면서 자신에게는 유독 관대한 잣대를 적용하고 남 탓을 일삼는 이익집단이나 개인의 민낯이 드러나는 경우도 흔하다.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게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기주의나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상의 미래는 암울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취지가 좋은 일이라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일수록 “아주 기쁠 때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라. 나보다 훌륭하고 더 많이 갖춘 사람과 비교하면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 아주 괴롭고 우울할 때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라. 나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의 문장을 되뇌자. 차분하게 인생여정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멋진 인생 아니겠는가. 열정과 재능은 꾸준히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인류를 위해 사용될 만한 스킬이 된다.

홀가분한 삶을 꿈꾸거든 상상력을 확장시키며 당신 밖으로 나가보라. 그대가 늘 경험했던 가을보다 더욱 각별한 만추(晩秋)를 발견할 것이다.

한학수<청운대 방송영상학과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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