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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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25>
  • 한지윤
  • 승인 2018.05.0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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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형수는 줄곧 기저귀를 차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병이라도 앓고 있던가요? 아니면 수술이라도?”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랍니다. 나면서부터 줄곧 그렇다고 합니다.”
“야뇨증은 아니겠죠?”
“아닙니다. 낮이나 밤이나 차고 있다고 합니다.”

한 박사는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기하게 생각지도 않았다.
“보지 않고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지만 ‘루’라는 병이 있어요. ‘루’라고 좀 어려운 글자를 쓰지요. 발생하는 부위에 따라서 이름이 다른데 질과 그 접촉 장기 사이에 구멍이 생기는 수가 있어요. 만일 뇨도나 뇨관이나, 방광이 연결되면 뇨루라고 해서 소변이 새어 나오게 돼요. 직장과 직장 사이에 이상한 회로가 생기면 분루가 되지요. 좀 곤란한 병이지만 수술을 하면 대개는 좋아지는 경우가 많죠. 아이는 있어요? 형님 부부 사이에.”
“아이는 없습니다.”

한 박사는 김진우의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지금 자기가 술에 약간 취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김진우가 말하고 있는 그의 형수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만 머릿속에 기억이 되고 그것이 연결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한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소에는 비교적 냉정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인데 오늘 저녁은 상당히 심각해졌다고 느꼈다. 한 박사는 민영이가 산부인과의 어떤 수술을 받았으나 아이를 낳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집 사람의 이야기로는 날 때부터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며 만일 자기가 그렇게 되었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은 좀 지나친 것이고 확실하게 ‘루’라면 ‘루’로서 치료법이 있을 것인데‥‥‥”
“선생님, 치료될 수가 있겠습니까?”
“직장질루의 경우라면 좀 까다로운 경우가 없지는 않아요. 그건 그 부위가 세균의 소굴같은 곳이니 수술해도 곧 새로 균이 들어가서 화농하는 일이 많지요. 임시적으로 임시항문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고 어느 것이든 간에 ‘루’가 있는 부위의 장기를 광범위하게 박리시켜서 장기가 원활하게, 다시 말해서 잘 움직이도록 해 줄 필요가 있지.”

“그럼, 그 구멍이 있는 곳을 꽁꽁 묶어 봉합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 않고, 조직을 신선하게 해서 결합시키려면 모세관을 재생시켜야 하거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꽁꽁 묶어 봉합하면 할수록 좋지 않아요.”
한 박사는 기분 좋게 취해 오고 있었다.
“한 번 형수님을 모시고 와요. 내가 봐 드릴테니.”
“감사합니다. 형에게 말해서 찾아가 뵙도록 하겠습니다.”

김진우는 얼마 더 앉아 있다 돌아갔다. 10분쯤 지나서 김진우의 명함을 곁드린 과일 한 바구니가 한 박사의 방으로 배달되어 왔다.
TV의 프로가 바뀌어졌는지 옆방과의 사잇문이 열리면서 딸 유리가 한 박사의 방에 들어왔을 때는 읽고 있던 책을 누운 가슴 위에 얹고 있었다.
“아빠, 벌써 잠들었어?”
유리는 사내아이 같은 말투로 말했다.
“자고 있지 않았어. 생각하고 있었지.”

그건 거짓말도 되고 정말도 되는 것이다. 한 박사는 잠자는 것, 책을 읽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 적당히 하고 있다고 지적당하면 그대로이다. 그것은 한 박사에게는 그 이상 없는 자연스럽고, 인간적이고, 혹은 철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아빠, 이거 웬 과일이야?”
유리는 과일을 보고 물었다.
“호텔에 있는 분에게서 받은 거야.”
“어떻게 해서?”
“글쎄, 어떻게 한 건지‥‥‥ 우리가 자주 여기 오기 때문인가‥‥‥”
“자주 안 오잖아. 작년 여름방학 때 왔는데.”
“그랬지, 참.”

한 박사는 사내 말투를 쓰는 딸의 기억력에는 졌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그럼, 혹시 아빠가 잠시 병에 대한 상담을 해 주었는지도 모르지.”
“언제?”
“지금 유리가 할머니와 TV를 보고 있는 동안에 아빠에게 손님이 왔어요.”
“응, 몰랐어.”
“그 분의 아는 사람이 병이래. 그래서 조금 이야기해 주었더니 이 과일을 보내왔어.”
“아빠, 수입 잡았네. 아무 일도 한 것 없이 과일 한 바구니 얻었잖아? 약도 안 주고?”
“그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되지. 아빠는 쭉 잠옷 입고 있었으니까.”
“이거 먹어도 좋아?”
“그럼, 좋지. 할머니께도 드려야지..”
한 박사는 한 잠 푹 자고 난 기분이었다.

“할머니, 아빠가요, 말 조금 해주고는 과일 선물 받았대요.”
유리가 옆방에서 할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말을 조금 해 주기 위해서 아빠는 오랫동안 공부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조금 말해주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런 것을 주지는 않아요.”
“그것도 그러네.”
“할머니, 뭐 잡수실래요? 바나나? 감귤? 사과도 있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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