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호남 유학, 노사학파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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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호남 유학, 노사학파를 중심으로
  • 원광대학교 김봉곤 교수
  • 승인 2018.08.04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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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6>
일제의 호남의병 대토벌작전에 의해 체포된 호남지역 의병장들, 1909년, 독립기념관 소장. 황두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계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송병문, 오성술, 이강산, 모천연, 강무경, 이영준.


호남지역의 의리정신 실천 노사학파 형성과 관련
기정진 위정척사방략 사대부층 도덕적 해이 비판
유학 현대적 계승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경세론 실천



19세기 이래 호남 사회는 부정부패 척결과 도덕과 의리에 바탕을 둔 국가 건설에 노력해왔다. 1862년에는 삼정문란에 항거해 국가의 재산을 축내고 민생을 피폐케 했던 정치구조의 타파와 경제구조의 확립을 외쳤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돼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아래 백성이 주체가 돼 공공의 사회질서 확립과 외세를 배격하는 거대한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곳곳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해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해방 이후로도 이 지역은 민주주의 수립과 통일국가 형성을 위해 앞장섰다. 1960년에는 4.19 의거에 적극 가담해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이승만의 대통령 하야를 가져오는데 앞장섰다. 1980년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 전두환의 폭압적인 군부독재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최근에는 촛불시위를 통해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된 대통령을 탄핵해 물러나게 했고,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통일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 19세기 노사학파 대두와 호남유학 

노사 기정진의 초상화.

호남지역에 이러한 강인한 의리정신의 실천은 19세기 중엽 기정진의 출현과 노사학파의 형성과 관련돼 있다. 기정진은 제국주의 침략과 국내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한편, 우리 역사와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바를 이일분수(理一分殊) 철학체계와 공공(公共)에 바탕을 둔 경세론을 통해 명확히 제시했다.

그 사상의 깊이와 독창성은 단연 조선 성리학의 최고수준을 이루는 것으로서 호남과 영남뿐만 아니라, 기호 지방의 화서 이항로의 문인들의 지지를 받음으로서 19세기 중엽 하나의 거대한 학파를 이뤘다. 

기정진의 사상의 형성은 정조대 이후 천주교에 대한 대책 즉 정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한다는 국가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1843년 ‘납량사의’를 작성해 리(理)가 만사, 만유에 관철되어지는 세계를 확립했고, 1853년에는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에 대해 리함만수(理涵萬洙)로서의 리통(理通)의 체계를 제시했다.

이어 그는 1877년 문인인 조성가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외필(猥筆)’을 짓고 ‘기자이 비유사지(機自爾 非有使之)’의 주장을 리의 역할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하여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 기는 리의 절대적 지위와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정진의 주장은 매사에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자제하고 시비를 분별해 천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정진은 또한 1862년 ‘임술의책(壬戌擬策’을 지어 부패한 사회의 개혁과 공공(公共)의 사회·정치질서를 부르짖었다. 그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와 운영을 위해 균전제의 바탕위에 양반 등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 수취 체제로 전환해야 하며, 사회적으로도 서원을 철폐하고 과거제도를 개혁하며 사치풍조를 없애서 천하의 공공을 실현해야 한다는 사회개혁론을 제창했다.

기정진은 1866년에는 병인소(丙寅疏)를 올려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하고 침략을 막기 위한 내수외양책(內修外攘策)을 제시했다. 기정진의 위정척사방략은 사대부층의 도덕적인 해이와 특권을 비판하고, 군왕의 수신을 통해 인심을 결집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내수책(內修策)으로서의 특징이 강하다. 또한 기정진은 서양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서양과의 통상 거부나 사령(辭令)의 준비, 험한 지세를 이용한 향촌단위 방어체제의 구축 등 구체적인 외양책(外攘策)을 제시햇다. 그가 양반도 포함해 각 고을마다 군비를 갖추자고 주장한 것은 왜란이나 호란 때의 호남 지역 의병활동에 관한 저술을 많이 작성하면서 얻은 결론이기도 했다.

노사 기정진이 배향돼 있는 전남 장성의 고산서원.



■ 노사학파의 의병운동
이러한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과 주리론은 600명에 달하는 문인들과 다시 6천여 명이 넘는 재전문인들에게 계승되어갔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이에 반발해 기정진의 손자이자 호남유림의 종장이었던 기우만이 장성, 나주 일대의 의병을 모아 일제에 맞섰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1907년 8월 고광순(高光洵)은 창평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원과 지리산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어 기삼연(奇參衍)은 9월 호남의병을 망라해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고 곳곳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에 일제는 1908년 초 가혹한 진압작전을 전개해 기삼연을 비롯한 200여 명의 의병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1909년에는 호남의병 대토벌작전을 전개해 의병의 근거지를 완전히 박멸코자 했다(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연구, 일조각, 2004, 449쪽).

면암 문인의 경우도 1906년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참여한 유생의 숫자만 해도 500명이 넘었다. 최익현과 임병찬을 비롯해서 이른바 12의사가 압송된 이후에도 강재천, 백낙구, 황준성 등은 줄기차게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호남지역은 노사학파와 면암문인의 주도로 의병운동이 전개됐지만, 연재나 간재학파에서도 의리의 실천을 등한시 한 것은 아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요되자, 연재 송병선은 을사조약 파기와 5적 처단을 주장하면서 죽음으로 항거했던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요되자, 연재 송병선은 을사조약 파기와 5적 처단을 주장하면서 죽음으로 항거했고, 간재 전우 역시 상소를 올려 5적신을 벨 것을 청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국을 통탄하고 유학의 근본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1908년 왕등도와 같은 서해 고도에 들어가 은거함으로서 결코 일제의 국권침탈에 굴복하지 않는 결의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학파간의 대립과 차이는 시국에 관한 이해와 의리정신의 구현방식에 차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 호남유학의 향후 과제
현재 호남유학은 향교나 서원 등에서 전통사회의 윤리를 수호하고 선현들을 숭앙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활동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호남 유학이 현대사회에 맞춰 적극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노사학파의 이일분수와 의리정신은 시민이 주체가 되는 공공의 사회건설과 남북의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체계가 될 수 있고, 간재학파의 성사심제설은 도덕의식의 상실과 사회질서의 붕괴 등에 대한 다양한 대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학의 적극적인 현대적 계승은 유학에서 본래 추구하였던 수기치인의 이상에 도달하는 것이고, 공맹(孔孟) 이래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경세론의 실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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