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배추 시설재배 도전 근면으로 가난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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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배추 시설재배 도전 근면으로 가난 극복
  • 취재=허성수/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08.17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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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일구는 색깔있는 농촌마을 사람들<20>

농촌마을 희망스토리-은하면 화봉리 중가
하가마을에서 본 중가마을 전경. 28호밖에 안 되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부지런한 근성은 어느 마을도 따라올 수가 없다.

은하면 화봉리는 4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 위치한 마을을 ‘중가’라고 부른다. 물론 중가 위에는 ‘상가’, 아래는 ‘하가’가 있으며, 상가와 중가를 경계로 동쪽에 ‘야동’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다. 중가마을은 은하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광천읍과 매우 가깝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가산면 상가리, 중가리, 하가리와 야동을 병합해 꽃처럼 생겼다고 화봉(花峯)리라 했다고 전해진다.

■ 벼농사대신 시설 채소 재배 눈 돌려

박옥규 이장

중가는 결성면과 구항면에서 광천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교통이 매우 좋은 편이다. 왕복 2차로인 홍남로 96번 지방도가 마을 앞을 지나가며 서해안고속도로 광천IC가 불과 1km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어 외지로 나가기도 좋다. 오래 전 옛날에는 마을 앞 들판이 바다여서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옛날 바다와 관련된 지명으로 ‘조개재고개’가 있다. 중가에서 상가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리키는 말로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전설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재 28가구 50여 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마을로 야트막한 산들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자연부락 형태다. 옛날부터 논 면적이 좁아 벼농사를 많이 짓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주민들은 곡식이 많이 나지 않은 동네라 너무 힘들게 살았다. 은하초교에서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먹이려고 운동장에 고구마를 많이 심기도 했다. 교장부터 대부분 일본사람이었던 교사들은 월사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마구 때렸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맞아서 시커멓게 된 얼굴로 중가마을 학생들이 귀가했다고 한다.

쌀이 귀하던 시절 어렵게 살아야 했던 중가 주민들은 부지런히 밭을 일궈 가난을 극복했다.
“홍성군에서 비닐하우스 채소 재배를 가장 먼저 한 곳이 중가마을입니다. 광천읍이 가까워 전형적인 도시 근교농업을 했으며 광천장이나 홍성장에 직접 채소를 갖고 가서 팔아 소득을 올렸습니다.”

중가마을 박옥규 이장의 말이다. 중가마을이 배추에 눈을 돌린 것이 1970년대다. 당시 농업학교 교사들이 와서 배추 재배방법을 가르쳐 주자 한두 사람이 시도를 했는데 소득이 좋았다. 그래서 동네 주민들이 너도나도 배추농사를 하면서 홍성군내는 물론 충남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배추재배단지로 알려졌다. 중가마을의 밭이란 밭은 모두 배추였고 봄가을 두 번 수확을 해 고소득을 올려 부촌이 됐다. 벼 수확이 끝나면 바로 배추를 수확하기 때문에 1년 내내 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중가마을은 “배추를 팔아 자식을 대학 보낸다”는 말이 널리 회자될 정도였다. 지금도 주민들은 논농사보다 밭농사 위주로 농사를 한다. 아울러 축산도 같이 병행하는 주민이 많다.

■ 농한기도 놀 줄 몰라
부지런히 밭을 일궈 부농의 꿈을 실현한 중가 주민들은 요즘도 농한기를 그냥 보내지 않는다. 일손을 놀릴 줄 모르는 부지런한 근성 때문에 겨울철에는 온 동네 주민들이 모여 한과를 만들어 판매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 사업을 시작한 것은 18년 전부터였다. 처음에는 소일거리로 시작했으나 모든 가구가 참여하면서 공동작업으로 발전했다. 당시 이문수 노인회장이 쌀 분쇄기와 흔들채 등 필요한 기계를 마을에 도입해 설치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광천읍까지 쌀을 빻기 위해 나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과 제조 시스템을 제대로 갖춘 후에는 더욱 효율적인 상품 생산이 가능해져 10월말부터 다음해 구정까지 겨울철 서너 달 동안은 중요한 소득원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한과는 홍성장, 광천장, 대천장에 나가 직접 판매하기도 하지만 출향민, 친지 자녀들이 주로 구입하면서 입소문이 퍼지자 전화 주문도 쇄도하고 있다. 

“주민들이 농한기에도 놀 줄을 몰라요. 농산물을 가공 판매하는 사업이라도 벌여 돈을 버니 영세민이 없는 마을입니다. 중가는 모두 같이 더불어 잘 사는 마을이죠.”
 

중요한 선거가 있을때 마다 투표소로 사용되는 구 중가마을회관.
구 회관옆에 세워져 있는 현 중가마을회관은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 다른 마을보다 일찍 전기불 켜
중가는 1960년대에 인근 마을보다 먼저 전기가 들어와 문명의 혜택을 일찍 누리며 부러움을 샀던 마을이기도 하다.  “중가는 1967년 자립전기가 들어왔습니다. 당시 광천읍 인근 마을에도 전기가 안 들어왔을 때 자력으로 전기를 끌어와 썼습니다.”

당시 결성면에 있는 금광에는 이미 한국전력에서 전기가 공급되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거기까지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연결해 각 가정에 전기불을 밝혔던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서야 한전에서 공급하는 전기가 홍성군내 모든 농촌지역에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전화도 중가마을에는 일찍 들어온 편이었다. 1980년대에 한 가구당 30만 원씩 거둬 전화를 가설했다. 당시의 물가로는 엄청난 비용이었으므로 적잖은 주민들이 불평했지만 회의를 통해 다수결로 결정되자 모두가 말없이 따랐다. 막상 전화가 가설되고 나니 이렇게 좋은 세상 늙어서 죽어야 하는 인생을 원망하며 모든 주민들이 좋아 했다고 한다.

“중가는 현대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마을이었습니다. 우리 마을은 항상 앞서 갔어요.”
박옥규 이장은 마을의 발자취를 뒤돌아보며 대견해 한다. 중가는 지금 노동력이 고령화되고 젊은층이 거의 없어 옛날만큼 밭작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채소류도 규모를 많이 줄였다.

“최근에는 4개의 행정리로 나눠져 있지만 옛날에는 법정리인 화봉리 마을이 하나였습니다. 4개의 행정리로 나눠지기 전에는 화봉리가 은하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로 은하면 체육대회를 하면 우승컵과 우승기를 많이 가져왔습니다.” 박 이장은 그만큼 단결력이 좋았다며 전성기였던 과거를 회상했다. 청년회는 화봉리 4개 부락이 같이 모여 하나의 단체를 이루고 있다.

■ 6·25 때 주민 살린 이종근 교장
중가마을도 6·25 전쟁의 아픈 기억이 있다. 박옥규 이장은 인민군들이 마을을 장악하면서 어쩔 수 없이 부역을 해야 했던 주민들이 갑자기 국군의 수복으로 퇴각한 후 우익 청년들에게 학살을 모면한 사건을 들려줬다.

“6·25 때 좌우익으로 나눠졌을 때 당시 은하초교 이종근 교장이 많은 목숨을 건져줬습니다. 의용군에 동원된 주민들이 인민군이 물러간 후 죽임을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나 이종근 교장이 나서서 숨겨주고 학살하지 못하도록 막아줬습니다. 이 교장의 아들은 육군 대위로 6·25전쟁에 참전해 전사했습니다.”

■ 농공단지와 유기적 관계 아쉬워
중가에는 은하농공단지가 있다. 그러나 박 이장은 마을과의 관계는 소원한 편이라며 당초의 목적에 의문을 제기했다.

“농공단지가 들어온 목적은 도농복합단지를 만들어 시골의 유휴인력을 채용하고 공생하는 것인데 지금 마을에서 그곳에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용과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미흡해 주민들과 갈등이 있다고 말했다. 박옥규 이장은 젊은 시절 잠시 외지에 나갔다고 돌아와 축산을 하면서 평생 고향을 지키고 있다.
 

중가 할머니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더위를 식히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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