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희망봉
뜻밖의 역사

“나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소망한다”고 말하는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있다면 그는 뼛속깊이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소문난 인권운동가였던 미국인 호머 헐버르 박사는 구한말 이 땅에 있다가 한국을 사랑하게 된 그 어떤 서양인 못지않게 한국을 사랑했고 소원대로 이 땅에 묻혔다. 그가 쓴 ‘한국사’에는 이런 놀라운 사실이 기록돼 있다. 임지왜란을 일으켜 7년간이나 조선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잡아가고,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풍신수길을 죽인 것은 명나라 사람 심유경의 환약이고, 심유경과 풍신수실을 연결시켜 준 사람은 한 조선 소년이었다는 것이다. 그 소년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1592년에 동래에서 일본군의 노예로 붙잡혔다가 대마도로 끌려간 ‘양부하’라는 소년이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평수길(우리 선조들은 풍신수길을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불렀다)의 궁전까지 들어가게 됐다. 사람 보는 눈이 예리했던 평수길이 양부하 소년을 눈여겨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에게 일본말을 가르쳐라. 잘 배우지 못하거든 목을 쳐라.” 그 아이는 일본말을 배운지 석 달 만에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자 평수길은 상으로 그 아이를 자기 몸종으로 삼았다.

양부하는 어느 날 심유경을 보게 해달라고 평수길에게 청했고 평수길은 허락했다. 조선인 소년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평화협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평수길의 궁전에 갇혀 눈물 속에서 나날을 보내던 심유경의 처지를 동정해 그가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게 도와줬다. 그 뒤 심유경은 수길의 처소에 수시로 불려 다니다가 친해졌다. 어느 날 심유경이 북을 끼고 앉아 있다가 환약을 꺼내 삼켰다. 그가 여러 날 동안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자, 수길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게 뭐냐고 묻는다. “소화제인데 이 약을 먹으면 몸에서 힘과 정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수길은 그의 손에서 약을 빼앗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펴봤다. 한쪽에 ‘뜨겁다’는 뜻의 한자가 적혀있었다. 약효는 자극적이었고 기분을 좋게 했으나, 그 약은 몸의 피를 마르게 하는 독약이었다. 심유경은 매일 평수길과 약을 나눠먹었으나 자기 방에 돌아오면 곧장 독을 중화시키는 약을 한 첩씩 들이켰다. 평수길의 몸은 점점 굳어지고 말라갔다.

수길은 “나는 죽은 몸이다. 내가 숨을 쉬지 않거든 내장을 빼내고, 가른 부위는 말갈기로 꿰매라. 그런 다음 내 시체를 술에 담가 보관하라. 내가 죽은걸 외부사람들이 절대로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다. 그의 죽음 이후 두 달 동안 궁궐 밖에서는 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악취가 너무 심해 궁중 사람들은 풍신수길이 죽었음을 밝히고 말았다. 풍신수길(평수길)이 죽자 이에야스는 반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수길의 시체를 소금에 절인 다음 나무틀에 똑바로 앉히고 눈을 부릅뜨게 한 뒤 너무 밝지 않은 곳에 안치했다. 임진왜란의 끝자락 정유년(1597년) 8월이었다. 이에야스는 풍신수길의 아들을 쇼군으로 앉히고는 조선 침략의 두 선봉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둥청정)와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처와 자식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고 일본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동서양역사에 두루 통달했던 헐버트 박사의 이 쇼킹한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우리는 일제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비롯한 각종 귀중한 저술들 십여만 권 혹은 몇 십만 권을 불태워 없앤 사실을 알고 있다. 실제로 헐버트 박사는 그 책들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기 전에 필요한 사서를 읽어보았고, 이를 토대로 ‘대한제국 멸망사’, ‘대동기년’등의 역사책을 쓴 것이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가케무샤(景無者一:그림자가 없는 사람)는 풍신수길의 사후를 처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화를 영화화 했음을 알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죄 없이 남의 나라에 붙들려간 한 소년의 착한 심성과 조국애가 결국 비참한 전쟁을 앞당기는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이원기 <청운대 교수·칼럼위원>

이원기 칼럼위원  hjn@hjn24.com

<저작권자 © 홍주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원기 칼럼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포토 뉴스
PREV NEXT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