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지역 유생들의 근대교육 참여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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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지역 유생들의 근대교육 참여와 성격
  •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김형목 선임연구원
  • 승인 2018.09.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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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 유학<11>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8일 논설 ‘홍주의 광명의숙을 하례하노라’. 유생들은 근대교육을 위해 근대학교를 세우는데 앞장섰고 홍주유림 제씨는 화성면에 광명의숙을 세웠는데 언론이 이를 주목해 기사를 작성했다.

조선후기 홍성 가뭄과 해일 피해와 동학과 화적 등 민심불안
근대교육에 대한 관심…선교 사업 주민들 실생활 요구 부응
유생들 교육활동 부응 향학열…민족해방운동 주역 성장 거듭


■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다
조선후기 홍성은 포구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삼남요로(三南要路)로서 부각됐다. 농업과 어업을 겸비한 홍성을 포함한 내포지역은 특히 가뭄과 해일 등에 따른 피해가 적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한재·수재 등은 농업생산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동학 여당과 의병을 빙자한 화적 등도 민심불안을 가중시켰다. 급격한 신분제 이완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질서 수립은 진통을 수반했다.

‘을사늑약’ 이후 홍성인들은 격심한 ‘변화’를 경험했다. 이 설(李卨), 김복한(金福漢)등의 ‘을사늑약’ 부당성에 대한 상소로 시작된 의병전쟁은 인적·물적 기반을 뒤흔들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의병·민간인 사망과 홍주성 주변 10리 이내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사회적인 불안은 주민들 상호간 불신·갈등을 증폭시켰다. 특히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일삼는 등 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반개화와 반제국주의 기치로 배일의식은 점차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 유생들이 근대교육을 견인하다   
이러한 가운데 근대교육에 대한 관심도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빈번한 물물교류와 다양한 경험은 새로운 사회질서의 재편을 요구하는 계기였다. 더욱이 개신교 전래는 가치관의 변화를 초래하는 기폭제나 다름없었다. 교세확장을 위한 선교 사업은 당시 주민들의 실생활 요구에 부응하여 이뤄졌다.

홍주군수 김상연(金祥演)은 서울에서 양정의숙과 광신상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 인물이다. 이는 향중부로들을 효유하는 한편 이를 통해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그는 시세변화에 부응한 민권신장을 위한 일환으로 지방관에 부임했다. 인습이 강고하게 잔존한 현실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홍주경찰서 경부 최건호는 동리를 방문해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또한 관내 교육기관에 대한 지원은 물론 명예교사로서 나섰다.

기호흥학회 홍주지회는 교육열 고조에 따라 주민 부담에 의한 3면1교제 시행을 계획했다. 이는 주민 부담에 의한 사실상 의무교육이었다. 유곡면 월현리 홍명학교는 김병목(金炳穆), 김시원(金始元), 조중헌(趙重獻), 윤자정(尹滋鼎)등에 의해 설립됐다. 임원진은 관찰사인 교장 김가진(金嘉鎭), 부교장 이정식, 교감·학감 김시원, 총무 김병목, 평의장 윤자정, 찬성장 김상연(金祥演), 회계 정인오(鄭寅五), 교사 이강인(李康寅), 이약우(李若雨) 등 이었다. 100여 명에 달하는 학생은 갑·을·병 3반으로 나눠 가르쳤다. 운영비 부족으로 학교가 폐교에 직면하자, 학생들 9명은 단지동맹을 결행했다. 이들은 군수와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 학교 발전책을 요청함으로써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전참봉 조동헌(趙重憲)은 삼천환 기부를 약속했다.   

김병익(金炳翊), 김병수(金炳秀), 김병원(金炳鵷), 김선규(金善圭), 윤필(尹泌) 등은 호명학교를 설립했다. 이들은 판서·의관·군수 등을 거친 전직 관료로서 윤필을 제외하고 안동김씨 문중인들이었다. 이는 개명한 문중에서 설립한 문중학교(門中學校)나 다름없었다. 임원들은 법률전문과를 부설로 운영하는 등 근대사회 시민으로서 준법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는 사립학교 설립을 유도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특히 최병창(崔秉昌) 등이 설립한 금난의숙(金蘭義塾)은 충청도에서 기호학교 지교로 인가를 받은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덕명의숙(학교)은 1908년 발기인 서승태(徐承台), 찬성장인 군수 윤필 등에 의해 설립됐다. 이들은 설립취지서를 통해 목적과 교명(校名)이 지닌 의미를 밝혔다. 이는 근대교육 수용과 전통교육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민족교육은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호흥학회 홍성지회는 덕명학교가 전주민 호응을 받는 등 기호지역 모범학교로서 본회에 보고했다. 이 학교는 박창병(朴昌秉), 이충호(李充浩), 서태석(徐台錫)등의 활동과 주민들에 의해 운영된 의무학교인 면립학교(面立學校)였다.

화성면 광명의숙 설립에 언론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발기인은 대부분 유림이었다. 당시 신문은 유림계의 모범적인 사례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상략)…대저 유림가 제씨는 저 노동하는 동포와 달라서 구학문의 근기가 있는 고로 신지식을 발달하기 쉬우며 정신으로 단결함이 있는 고로…(중략)…유림 제씨가 한번 깨달으면 일국에 유신사업이 발전되기가 아주 쉬울지라. 그런고로 광명의숙을 설립한 제씨를 위하여 바라고 다시 바라노라. 홍주는 13도 300여 군 중에 한 고을이오. 광명의숙 설립자 제씨는 홍주 유림 중에 한 부분이니 이 광명의숙 하나 발기된 것으로 어찌 유림계 전체에 광명을 만든 것이라 하리오마는…(중략)…홍주의 신사들이여 마음은 적을지라도 담은 적게 하지 말지어다.1)
1)『大韓每日申報』 1910년 2월 8일 논설 ‘賀洪州廣明義塾’ :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8일 논설 ‘홍주의 광명의숙을 하례하노라’.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주목과 아울러 교세는 거듭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김영규·이형종·최병현 등 생도들은 향학열로 이에 호응하고 나섰다.

이와 더불어 야학도 설립되는 등 주경야독하는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사회진화론 확산에 따른 근대교육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이를 추동하는 요인이었다. 국문야학과 상명노동야학교는 이곳을 대표하는 야학이나 마찬가지였다. 야학은 교육열 고조에 부응한 ‘새로운 배움터’로서 자리매김했다. 이곳 교육운동 주체는 대부분 전·현직관료와 재야 유생들이었다. 이들은 한글을 주요한 교과목으로 하는 국문야학을 설립했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해독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민족정신·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주요한 원천이었다. 민중에 대한 애정, 신뢰감은 이들을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등 근대교육 수혜로 이어졌다.

■ 신진 세대가 민족해방운동을 나서다
홍명·호명·덕명·광명학교 등 이른바 팔명학교(八明學校)는 홍주지역을 대표하는 근대교육기관이었다. 학생들은 유생들의 교육활동에 부응해 향학열을 불태웠다. 덕명학교 설립목적은 장래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유용한 인재양성이었다. 덕명은 학교가 소재한 덕정리를 개명(開明)하는 가운데 홍주군·충남 나아가 국가 전체를 유신한다는 의미였다. 발기인이자 교주인 서승태의 삼요론(三要論)은 민족교육기관으로서 성격을 보여준다. 역사적 정신(歷史的 精神), 상무적 기상(尙武的 氣像), 경제적 사상(經濟的 思想)은 이를 반증한다.

홍명학교도 역시 호서지역을 밝게 한다는 의미다. 곧 호서지역을 개명한다는 의미는 설립취지나 마찬가지였다. 홍명학교는 홍주지역을 문명개화하는 중심지로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관내 ‘팔명(八明)’학교 설립 계획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운동회나 휴식시간에 학생들은 ‘위국가’를 널리 애창했다. 구체적인 가사는 알 수 없으나,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근대교육 수혜를 받은 신진 세대는 자신들의 활로를 개척하는 동시에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무를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3·1운동과 이후 민족해방운동 주역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유생들의 실천적인 모습은 이들에게 계승·발전됨으로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밝히는 등불이었다. 이곳 유생들의 근대교육은 단순한 지식 보급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책무를 일깨우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유생들은 1910년대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와 1920년대 후반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등을 통해 참된 지식인 활동상을 보여줬다. 근대교육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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