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의 기계체조 부흥기 이끌며 전국대회 1위 휩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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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기계체조 부흥기 이끌며 전국대회 1위 휩쓸다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8.12.16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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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기계체조 선구자 이근춘 전 체육교사

이근춘, 60년 광천중 시절 충남체육대회 기계체조 1위 입상
광천상고·광천체육회 소속 61~63년 개인전·일반부 1위 입상
홍주중·고교 체육교사 근무, 체조선수 발굴 전국대회 휩쓸어
현재는 홍성의 구석구석 막힌 하수도 뚫는 자원봉사 실천해


기계체조(器械體操, Artistic gymnastics)는 기계를 이용해 신체를 건강하고 조화 있게 발달시키는 운동이다. 기계를 이용해 아름다우면서도 멋진 동작을 펼친다는 점에서 고대 사회에서부터 있어온 곡예나 재주 등의 유희에서 발달한 스포츠 종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기계체조는 18세기 후반 독일의 프리드리히 얀(Friedrich L. Jahn)이 창시한 것이다. 얀은 안마와 목마, 철봉, 평균대, 평행봉과 같은 기계를 이용하는 운동들을 고안했다. 당시 나폴레옹전쟁에서 패배한 조국의 청년들이 신체를 단련시키고 정신력을 향상시키고자 한 것이다. 얀은 1811년 베를린 교외에 노천체조장을 열고 독일의 청년들에게 기계체조를 가르쳤다. 당시 이 운동들을 투르넨(Turnen)이라고 했다. 이때의 투르넨은 육상 경기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투르넨이 오늘날과 같은 기계체조로 발전한 것은 ‘체조 금지령’ 때문이었다. 당시 독일을 지배하던 프로이센은 투르넨이 독일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스포츠라고 여겨 1820년에 체조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투르넨은 실내에서 암암리에 하는 운동이 됐으며, 육상 경기의 요소가 사라지면서 실내 스포츠로만 발전하게 된 것이다. 얀의 투르넨과 함께 오늘날의 기계체조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덴마크의 프란츠 나흐테갈(Franz Nachtegall)과 그의 제자 스웨덴의 페르 헨리크 링(Pehr Henrik Ling)이다. 프란츠는 1799년 코펜하겐에 사립체조장을 열고 많은 젊은이들에게 체조를 가르쳤고, 페르 헨리크는 생리해부학에 근거를 둔 새로운 체조를 고안해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체제로 자리 잡아 올림픽에서는 남자 6종목, 여자 4종목이 치러지며 금메달은 총 14개가 걸려 있다. 기계체조는 1896년 제1회 올림픽 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남자 종목은 철봉·평행봉·안마·링·마루·도마 등 6종목, 여자 종목은 마루·평균대·이단평행봉·도마의 4종목이 있으며, 올림픽에서는 이들 세부 종목 이외에 남녀 개인종합과 단체전도 치러지고 있다.

한국의 기계체조에서 지난 2012년은 역사적인 해로 기억되고 있다. 한국기계체조가 수십 년 묵은 ‘한’을 풀었기 때문이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처음 기계체조 종목에 참가한 이후 52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금메달을 획득했던 것이다. 당시 주인공은 우리나라 기계체조 ‘도마 1인자’로 꼽히던 양학선이었다. 양학선은 자신만의 독보적인 기술인 ‘양1’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선수들이 절대 넘보지 못 할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양학선은 런던올림픽 예선전과 결선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따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체조선수의 정신을 홍성지역에서도 실천한 사람이 있다. 홍성에서는 기계체조 선구자이면서 지도자요, 교사로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며 홍성의 기계체조 부흥기를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바로 전 홍주중·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를 역임한 이근춘 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충남도청소재지 홍성에서 또 다시 그 당시 전국을 휩쓴 기계체조의 부흥을 기대하면서 이근춘 선생의 체조 인생의 행적을 되돌아 봤다.

■ 홍성 기계체조 대부 이근춘 전 체육교사
홍성의 기계체조를 말할 때 이근춘(75)을 빼놓고 얘기를 할 수 없다. 이근춘은 1944년 홍성 장곡에서 태어나 반계초등학교(1955), 광천중학교(1958), 광천상업고등학교(1961)를 거쳐 단국대학교초급대학 체육과(1965)와 경기대학교 체육과(1977)를 졸업했다. 1970년 체육과 교사자격증을 취득했고, 1973년 기계체조 공인심판 자격증을 취득했다. 1987년 사회체육지도자 자격증, 1993년 청소년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1994년에는 대한유도회로부터 유도공인 3단 자격을 획득했다. 이후 2017년에는 수소수 테라피스트(국제수소수아카데미)자격을 취득했으며, 현재 MBG그룹 운영이사로 있으면서 홍성조류탐사과학관에 근무하고 있다.

이근춘은 1968년부터 양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교직에 몸담은 후 1979년까지 광흥중·고등학교, 홍주중학교, 홍주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이 과정에서 1960년부터 기계체조와 인연을 맺었다. 1962년 광천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광천중학교 기계체조부 코치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는 광천중학교와 광천상업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기계체조분야에서 전국 규모의 각종 기계체조대회에서 1위로 입상하는 등의 재능을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근춘은 1960년 광천중학교 재학시절부터 충남종합체육대회 기계체조에서 1위로 입상한 것을 시작으로 이혁진 외 5명이 출전한 충남종합체육대회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1위에 입상하는 등 메달을 휩쓸었다. 광천상고 재학시절인 1961년에 이근춘은 충남종합체육대회에서 기계체조 개인전 1위에 입상한다. 1963년에는 광천체육회 소속으로 충남종합체육대회에 참가한 이근춘은 역시 기계체조에서 일반부 1위로 입상했다.

■ 홍주중·고 체육교사로 체조선수 육성
1971년 광흥중·고등학교 교사에서 홍주중학교 체육교사로 옮긴 이근춘은 본격적으로 체조선수 발굴에 힘쓰기 시작한다. 홍주중학교가 신설 개교한 관계로 홍주초등학교에서 기계체조를 하던 권오석 등의 선수를 스카웃 해 본격적으로 기계체조 선수를 발굴·육성에 나섰다. 발굴한 선수들은 훈련을 통해 1973년부터 권오석, 장종원, 신홍철 등 6명의 선수를 이끌고 충남소년체전에서 홍주중학교 선수단이 1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후에도 홍주중학교 선수단은 1975년에는 충남교육감기체조대회와 충남체조협회장기대회에서 1위, 제3회 전국문교부장관기 체조대회 1위, 제4회 전국소년체육대회 2위에 입상했다.

이근춘은 1976년 홍주고등학교가 신설되자 홍주중학교 체조부 학생들을 모두 홍주고등학교로 진학시키고 자신도 자리를 옮긴다. 홍주고등학교로 옮기면서 1976년 충남교육감기체조대회 1위, 1977년 제5회 문교부장관기체조대회 1위, 제23회 KBS배 체조대회 1위, 제58회 전국체육대회 2위, 1978년 종별선수권대회에서 홍주고선수단이 1위, 제6회 전국체육대회 1위, 제6회 문교부장관기체조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이근춘은 한·일친선고등부교환경기 체조대회(대한체조협회)에 감독으로 참가한다. 1979년에는 제4회 KBS배 체조대회 1위, 충남체조협회장기체조대회 1위, 제6회 문교부장관기체조대회 1위, 전국체육대회 1위 등의 성적을 거두게 된다. 전국체육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홍주고등학교 3학년 체조선수단(당시 권오석, 신홍철, 이기행, 김용복, 박종운, 길운용)의 선수 전원을 충남대학교 체육과에 무두 장학생으로 진학시켰다. 이들은 대학졸업 후 교직에 몸담는 등 사회활동도 왕성하게 하면서 지도자로 성장했다. 홍성지역에서 최초로 기계체조를 부흥시키는 지도자로, 체조부 전원을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시킨 교사로서의 소임을 다한 이근춘은 홍주중·고등학교에서 자신과는 사전에 아무런 상의 없이 체조부 전원을 대전의 학교로 전학시키고 축구부를 창단하자 이에 반발해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난다.

이근춘은 교육자로서, 체조지도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학생들을 지도해 전국 규모의 각종대회에서 수차 1위에 입상하는 등 좋은 성적을 보임으로써 홍성체육발전과 기계체조 발전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부터 충남체조협회장으로부터 지도공로상을 수상하는 등 각 단체로부터 많은 수상기록도 남겼다. 충남교육감으로부터 우수지도교사상 3회, 대한체조협회장으로부터 우수지도교사상, 표창장 등을, 체육부장관으로부터 올림픽 기장증과 참여상을, 충남도지사와 홍성군수로부터 체육발전 공로로 표창장과 감사패 등을, 한국산악회장으로부터 자연보호 공로패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학교의 교육현장을 떠난 이근춘은 홍성읍에서 금메달체육사를 운영하면서 1988년에는 홍주라이온스클럽을 조직하는데 앞장섰으며, 1991년에는 제4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 막힌 하수구 뚫는 등 봉사하는 시간
현재는 자원봉사를 하는 심정으로 홍성읍 구석구석의 막힌 하수도를 뚫는다. 어둠이 갇히고 날이 밝아오는 오전 6시부터 7시 30분경까지 도로변을 따라 하수구의 막힌 곳을 꼬챙이로 파낸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인도를 지나다 보면 차량이 튀긴 물로 인해 옷이 젖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자세히 살펴보니 하수구로 물이 잘 내려가면 되는데 막혀 있다 보니 자꾸 범람해 그런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근춘은 조양문에서 홍성역, 홍성군청에서 홍성중학교, 홍주초등학교에서 덕산통 사거리 , 홍성읍 원우타운에서 홍주고등학교, 덕산통 사거리에서 홍성터미널까지의 도로에 있는 하수구가 막히는 것을 뚫고 다녔다고 한다. 차가 없는 이근춘은 거리를 모두 걸어 다닌다. “주로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오전 6시부터 7시30분까지 일을 한다”며 “힘은 들지만 다 하고 나면 다니는 사람들은 편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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