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놀이 프로젝트를 통한 공공미술을 선 보이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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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놀이 프로젝트를 통한 공공미술을 선 보이는 작가
  • 황동환 기자
  • 승인 2019.06.1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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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크아티스트 김영수

가스통, 하우스파이프, 트랙터 부품, 호미 등 버려진 물건이 작품 소재

단정한 옷차림이었지만, 검정색 중절모 아래 시커먼 선그라스 안쪽으로 언듯 비치는 민머리와 윤기나는 피부톤에서 몸속 가득한 영감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김영수(47) 작가. 고암 이응로 생가기념관 옆 카페 앞에서의 그와의 첫만남은 강렬했다. 인천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던 김 작가를 홍성에서 만날 수 있게된 것은 이응노 문화마을의 마을추진위원회가 기획한 ‘상징조형물프로젝트’ 덕분이다.

통영가려다 홍성에 자리잡은 창작소
“이응노 문화마을의 마을추진위원회 한 분이 이응노 마을에서 상징조형물프로젝트가 있는데 같이 참여했으면 좋겠다라는 제안이 있어 마을에 와봤는데, 느낌이 좋아 작년 11월에 계약을 하고 작업을 해왔던 것입니다. 상징조형물프로젝트 참여작가 5인중 한사람으로 참가하게 됐는데, 제 작품은 마을에 있는 소재로 작품을 만들다 보니, 마을에 상주하게 됐고, 그 때 저를 도와준 동학이네 축사의 한쪽에 공방을 차려놓고 마을에 원주민처럼 몇 달씩 상주하게 된 것입니다. 마을 작업은 이미 끝났으나, 현재 하는 작업은 마을 사람들과 형 동생의 친분으로 하는 작품 활동입니다. 이장님과도 친해지면서, 기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보은으로 계약과는 무관하게 농장현판도 만들어주고, 바위돌에 그림도 그려주고 하면서 동학이네 축사가 아프리카 홍성 창작소가 된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게 이곳에 왔으나 고향처럼 친숙해졌습니다. 못자리 준비하는 과정도 봤으니 벼가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추수 모습도 보고, 오는 7월에 김해에서 열리는 국제비엔날레 참가하는 것 빼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4계절을 온전히 다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전업작가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삶
그는 인천에 소재한 ‘아프리카 목공소·철공소’의 대표다. 작년부터 전업작가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까지의 이력이 남달랐다. 서울 태생인 그는 부산 다대포에서 성장했다. 부산해양고에 입학해 3학년 때부터 15개월 정도 배를 탔다고 한다. 방황하다 해병대에 입대했고 제대 후 공사장 막노동도 했었다. 이후 시장에서 농산물 중매인 일로 모은 돈으로 사업도 했지만 수억 원을 빚지고 다시 막노동판을 떠도는 등 실패를 거듭하다 5년 전 동인천에 머물게 됐다.  

“그 때 저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었습니다. 사회의 온갖 ‘쓴물’은 다 뒤집어쓰고 거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내뿜는 상태였죠. 싼 월세 집을 마련하기 위해 동인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마음이 점점 편해졌어요. 위압감을 주는 큰 빌딩이나 큰길도 없었던 것이 마음에 들어 그곳에 머물기로 정한 것이죠. 무엇보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목공소를 열었다. 그렇게 시작한 목공일이 그를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캠핑하는 셈 치고 짐을 푼 후 심심해서 이것저것 만들고 있는데 어느 날 아주머니 한 분이 불쑥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테이블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여긴 목공소가 아니라고 했는데, 다시 그분이 30만원 줄 테니 하나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비록 제가 목공일을 제대로 해본 적은 없었지만, 한 달치 방값을 치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덜컥 수락했고, 이왕에 시작한 목공소에 간판이라도 달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지어 내건 것이 ‘아프리카(Afrika)’ 목공소였습니다.”

그가 간판으로 ‘아프리카’를 내건 이유는 ‘자신만큼이나 상처 받은 아프리카 땅에서 남을 위해 일하다 보면 치유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며 아프리카를 늘 동경해왔고, ‘자신과 같은 사람도 몸으로 때우면 쓸모가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김 작가는 작년에 홍성과 인연을 맺기 전에 통영으로 작업공간을 옮길 생각이었다. 통영에 그의 어머니가 계신다. “인천과 거리도 멀고 또 어머니가 아프시기도 하고 해서 비록 제가 제대로 부양할 형편은 안되지만,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만이라도 밥 한 끼 같이 하고픈 마음에 통영으로 옮기려고 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가 작업공간을 통영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통영의 양식장에서 나오는 양식장 쓰레기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스통, 이양기 부품들이 젓소로 재탄생.


가스통과 하우스파이프, 그리고 정크아트
그렇다. 그가 추구하는 작품은 정크아트(Junk Art)이자 리사이클링아트(​Recycling Art)다. 정크아트란 ‘폐품·쓰레기·잡동사니’를 뜻하는 정크(Junk)와 아트(Art)의 합성어로,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폐품·쓰레기·잡동사니 등을 활용한 예술 작품을 이르는 말이다. 정크아트는 1950년대 이후 서양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사람들이 쓰다 버린 물건이나 버려진 쓰레기에서 발견한 잔해를 이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버려진 잡동사니와 기계 부품 따위를 재활용(Recycling)해 조형예술 작품을 만들어 무분별한 과잉생산과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를 담거나 자원 순환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해서 리사이클링 아트라고도 한다.

 “저는 환경설치미술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텀블러, 플라스틱, 스트로우 같은 석유제품들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매체를 통해서 보면 태평양의 거북이 등에 빨대가 꽃혀있는 끔직한 광경을 목격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불필요한 석유화학제품들을 덜 쓰면 지구에 고통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가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들이 이른바 버려진 물건들과 잔해들이다. 마을에서 버려지거나 사용하지 않는 농기구 부품들이 그의 손을 거쳐 새 생명을 얻고 있었다. 버려진 하우스 파이프로 대나무 군락을 형상화 한 작품, 트랙터와 이양기 부품들을 이용해 손벌리고 서 있는 사람, 마을 한쪽에 나뒹구는 삽들을 활용해 아프리카인의 얼굴을 형상화한 작품, 가스통과 각종 농기구 부품들을 이용해 만든 젖소 등, 마을에서 활용하지 않는 도구들을 활용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켜 놓은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의 작품에 정크아트 이상의 것을 불어넣고 있었다. 작품에 사용된 소재들은 버려져 쓸모없는 폐자재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이미 친숙한 소재들이었다. 마을주민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익숙한 소재를 활용해 최소한의 것으로 생활하자는 즉 미니멀라이프 정신을 작품에 담고자 했고, 보는 이들이 소재만 봐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기 쉽게 만드는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새로운 실험, 창작놀이 프로젝트
이응노 문화마을에서의 그의 작업은 이미 끝났다. 그런데 그는 홍성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그가 홍성에 발이 묶이게 된 것은 그가 작품활동을 할 수 있도록 거처며 공방을 마련해준 마을 주민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11일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이 개최한 미술대회가 작가에게 또 다른 전기를 만들어줬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창작놀이 프로젝트를 통해 아이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 입소문을 타면서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미술대회가 있던 날 ‘창작놀이 프로젝트’는 작가가 먼저 제안했고, 마침 기념관이 추구했던 방향과 맞아떨어져 빛을 본 것이다. “저는 그날 받았던 좋은 느낌과 제가 이 마을에서 느꼈던 좋은 감정을 좀더 구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원래 하루 행사였는데, 제가 이 마을에서 받았던 좋은 느낌을 계속해서 표현해보고 싶어서 그 날로 끝내기엔 아까워 기념관의 허락을 받고 작업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제재소에서 구한 폐목들을 이용해 나무를 형상화 한 작품.

작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아이들에겐 큰 경험이고 신선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제재소 폐목을 모아다 큰 나무로 형상화한 작품은 처음에 전체적인 틀을 작가가 만들어주면, 아이들이 직접 창작활동에 참여하는 프로젝트였다. 전부 네 번에 걸쳐 형태가 변화된 작품은 계속해서 생동하는 작품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단지 한번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모하는 작품을 통해 일상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일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관람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한 작가의 아이디어가 주효했다.

작가와 인터뷰 중에 보충설명을 해주던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 신나라 학예연구사는 “이 프로젝트는 기념관이 기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술가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기획을 해서 이걸 해야지라고 하면서 창작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대회를 통해서 작가 자신이 받은 영감을 창작활동으로 구현하신 것이겠죠. 그런데, 그 활동을 저희가 이렇게 저렇게 해주세요라고  했다면 이런 작품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며, 기념관의 그 어떤 기획으로도 만들어질 수도 없는 작품이 구현되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너무 감사한 일이죠. 어렵게 접근하려는 것을 김 작가가 쉽게 공감할 수 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줬어요. 특히 홍성 같은 지역에서 미술의 현장을 경험하게 하는 기관은 이곳이 유일한데, 정적인 기념관에서 살아있는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을 작동할 수 있도록 충실히 도와주고 계십니다.”라며 연신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홍성의 미술관이 찾던 작가 김영수

손수레를 이용한 ‘고은농장’ 간판

사실 이응노 생가기념관은 그동안 남모르는 속사정이 있었다. 그동안 잘 풀리지 않던 과제를 안고 있던 기념관이 김 작가를 만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던 것이다. 홍성군 내에서 미술관의 기능을 하는 기관은 이곳이 유일하다. 1종 미술관으로도 등록되어 있는 미술관의 형태다. 새로운 현대미술 전시 등도 기획하고는 있으나 기념관의 성격도 있다보니 기본적으로는 작고하신 분과 관련한 전시, 유작 위주로 운영되었고, 그러다보니 정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기념관 측에선 현대작가들과 만나 협업하고, 미술대회를 개최하고, 고암 미술상, 이응노 화백의 컨텐츠나 기념관의 컨텐츠를 계속 동시대에 현재화해 정적이고 고정되어 있는 콘텐츠를 동태화 시키려 노력했는데 이게 잘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기념관이 김 작가와 조우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김 작가가 기념관에서 펼친 창작놀이 프로젝트는 정적인 기념관을 동태적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고 기념관은 평가하고 있다.

신 학예사는 “이 마을은 주로 거주하는 주민들의 연령층이 고령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계속해서 청년들, 성장하는 아이들, 청소년들의 유입을 계속해서 유도하려고 기념관 차원에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단순 보도자료 등의 홍보만으로 그들을 미술관으로 끌어들이기엔 한계가 있었습니다. 작가의 생동감있는 작품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만큼 생생한 경험을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마을도 생동감있게 재탄생되고, 작가의 작품공간도 열리고, 새로운 작품들이 탄생되고 또 다른 작품을 통한 작가의 정신이 구현되고, 기념관이 미술관으로서의 기능도 살아나는 데 김 작가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예술? 함께 노는 것!

젖소로 재탄생한 가스통, 대나무가 된 하우스파이프, 아프리카 아이들의 모습을 한 삽, 사람의 손이 된 호미 등, 김영수 작가는 대중의 시각과 언어로 사람들과 만나고 있었다. 그는 미술용어를 잘 이해도 못하고 또 근사하게 사용할 줄도 모른다고 했다. 작년부터 본격적인 전업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그의 말을 떠 올리면 그의 말이 단순한 겸손의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거추장스런 외피를 벗은 미술의 핵심에 성큼 다가서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술가가 아닌 일반인 누구라도, 아이든 어른이든 미술을 접하지 않은 일반인 누구라도 같이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공미술이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같이 느낄 수 있고 일상에 같이 침투할 수 있는 것이 공공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공공미술을 하고 싶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담벼락에 낙서하는 것도 공공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근사한 예술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작업할 수 있고, 사람들이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거죠. 제 작품 안에 엄청난 근사한 철학이나 인문학을 담고 싶은 마음은 저부터도 어려워서 싫고 그냥 사람들이 한번 보면 피식 웃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작품의 소재만 봐도 이게 뭔지 알 수 있는 제가 굳이 리사이클링, 지구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것에 공감할 수 있는, 그렇게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공공미술을 하고 싶은게 제 욕심이죠.”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사실 저는 예술이 뭔지 모릅니다. 굳이 말한다면 그냥 재밌고, 신나고 웃을 수 있으면 그게 예술이지요, ‘같이 놀자’가 제가 나름대로 정의한 예술의 개념입니다. 같이 노는 것이 예술이 아닐까요? 특히 대중예술, 공공미술이라 함은 같이 느끼고, 같이 소통하고, 같이 공감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작가가 말하기를 ‘사람들에게 현실에서 보지 못하는 지향할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 예술이다’라고 하던데요. 사실 그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 미처 사람들이 인식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져준다는 이야기도 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내가 공감하고 수긍되지 않는 부분을 따라와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해서 사람들 입장에서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경험해보지 못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예술도 필요하겠지만, 제 스스로가 그런 어려운 예술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같이 노는 대중예술, 같이 소통하고 공감하는 공공예술, 저는 앞으로도 이걸 하고 싶습니다.”

폐품, 쓰레기, 잡동사니를 활용한 예술작품 활동을 하는 정크아티스트 김영수. 정크아트는 말 그대로 쓰레기를 활용한 예술이다. 버려진 잡동사니와 기계 부품 따위를 재활용해 조형예술 작품을 만들어 무분별한 과잉생산과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를 담거나 자원 순환의 의미를 강조한다. 환경문제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시대에 정크아트는 우리에게 환경문제를 알림과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보여주고 있다. “버려진 그대로의 날것이 주는 질감을 살려 공업화되어 가는 산업사회의 비정함을 노래했다”며 정크아트를 소개하는 어느 작가의 설명에 김 작가는 공감, 소통, 놀이를 얹혔다.

2014년경부터 한국에서도 정크아트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예컨대 서울시는 2014년 4월 1일부터 4월 20일까지 사회적 기업 ‘위누’와 함께 폐가전제품과 장난감 20여 톤을 활용한 정크아트 작품 전시회 ‘다시 돌아와줘서 고마워’를 개최했으며, ‘품바의 고향’으로 불리는 충북 음성군은 품바와 정크아트를 맛볼 수 있는 예술촌 조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김 작가는 이응노 문화마을 이외의 지역에도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 마을을 지나며 우연히 자신의 작품을 본 이웃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씩 작품을 주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위를 거쳐 최근에 갈산면 어느 농가에 닭조형물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작가의 이런 설명을 듣다보니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홍성군 전체가 작가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마을 곳곳을 환하게 만들어 줄 것만 같다. 홍성군도 멋진 예술촌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니 홍성군 전체를 하나의 예술 도시로 만들어보는 것은 또 어떨까? 만일 그날이 온다면 그 발랄한 작품들 사이로 김영수 작가의 꾸밈없이 웃는 모습을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을 버스정류장 지붕 위 삽으로 만든 아프리카인.
대나무 군락으로 바뀐 버려진 호미와 하우스 파이프.
트랙터 등 각족 농기구 부품들로 만든 손 벌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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