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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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85>
  • 한지윤
  • 승인 2019.07.1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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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알겠어. 걱정 말아요. 그런데 지난 번 고혜련이란 분이 찾아간 적이 있지?”
“고혜련? 기억에 없는데요. 고혜련이가 누구지요?”
“내가 아는 사람인데 손녀가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 임신이 돼서 거기 의논하러 갔을 텐데.”
“네, 네, 그 분이 고혜련이란 분이군요.”
밤이었는지 아니면 점심 휴식시간인지 사택으로 찾아 왔기에 한 박사는 다소 기분이 상해서 응접실로 모시지도 않고 이름도 확실하게 듣지도 않았던 일이 기억났다.
“그래. 고혜련이라고 해. 조금 전에 전화가 왔어.”
“아이는 어떻게 됐죠? 벌써 낳았을 텐데.”
“낳았대, 5월 9일에. 딸이라 더구나. 그 때는 이미 손댈 수 없는 시기였으니까.”
“난 잘 듣지 않았지만 들어도 우리 같은 늙은이는 잘못 전하거든. 아마 찾아갈 거야.”
“어머니, 해산을 했다면 이제 아이는 소아과입니다. 낳은 여고생이라면 내가 보지만은.”
“안 된다면 할 수 없지만 나하고도 친한 사이니까 네가 도와 줄 수 있는 데까지 도와 줬으면 싶어서 그래.”
‘네. 알겠습니다. 힘쓰지요’ 라고 대답은 했으나 제물포의 어머니의 맨 끝말이 묘하게도 귀에 남아서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효도 한 번 못한 어머니다. 도와주라고 한 말이 이상하게도 가슴에 와 닿았다.
아이의 육체적인 결함이라도 있다면 소아병원이라도 소개할까하고 한박사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 맨 먼저 방문한 환자는 아이를 안고 온 고혜련이란 노부인이었다.
한 박사는 제물포의 어머니 전화를 깜박 잊고 있었다. 어느 쪽이 환자인가 하고 한 박사는 어리둥절했다.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생후 1,2주의 여자 아이에게 신생아 월경이라는 생리적인 성기출혈을 볼 때가 있어 아이가 환자인가 한 것이다.
“고혜련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는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노부인은 정중하게 말했다.

“선생님 모친께서 전화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있었습니다. 앉으십시오.”
나이분 간호사가 얼른 아기를 받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지난번에 의논드리러 왔던 외손녀의 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 여고생의 외손녀는 외딴 병원에서 딸을 낳았다.
이건 불시의 재난과 마찬가지였다. 임신인 줄 안 그 후부터는 온 집안이 뒤집히는 듯했다.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불명예의 원흉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외조부모가 되는 사람들이 좀 더 현명하게 처리하면 될 것을 50대 초인 조부라는 사람은 체면만 내세우고 있었고, 여고생은 어쩔 줄을 몰라 울기만 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도 고등학교 학생이라서 책임을 질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태어난 아이는 아이가 셋이나 있는 봉급생활자의 집에 월 10만원의 양육비를 주기로 하고 맡겨졌다. 한 때는 집안의 액이라도 물리친 기분으로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외증조모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출생 후 꼭 2개월이 되어서 그녀는 아무 예고도 없이 양육을 맡긴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학대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발육도 나쁘고 그저 방치해 두다시피 한, 약하디 약한 아이를 보곤 화도 나고 놀라기도 했다.
“어두운 집이었습니다. 햇빛이 들지 않은 집이었습니다. 안고서 밖에 나간 적도 없으니 한 번도 햇빛을 쏘인 일도 없이 컸을 거예요.”
노부인은 화를 냈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제물포의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올 수  밖에 방법이 없었다.
기저귀를 하루 몇 번씩이나 갈아 채웠는지 몰라도 엉덩이가 짓물러 있었다. 한 번도 안아 준 적이 없는 듯싶게 뒤통수는 절벽같이 되어 있었다.
우유 이외는 아무것도 먹이지 않은 듯했고 물론 주스라도 한두 스푼 정도 먹인다는 이유식의 준비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손자라면 또 몰라도 외증손에 대한 신경과민과 여행의 피로로 인해 고혜련이라는 노부인은 제물포에 오자마자 혈압이 급히 올랐다. 혈압강하제를 먹고 있으나 증손녀의 시중을 들고 있으면 뇌출혈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급히 아기를 맡길 사람을 구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선생님께 의논드릴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도와 주셔야 되겠습니다.”
노부인은 힘없이 말하고 도와 달라는 표정으로 한 박사를 쳐다보았다.
“보육원 같은 곳에 맡기고 싶으신가요?”
한박사는 노부인에게 물었다.
“네, 그것도 좋습니다만, 그보다는 누군가 책임을 지고 얻어갈 사람이 없을까요?”
“그럼, 댁에서는 이 아이가 필요 없다는 뜻이 되겠군요.”
“아이를 낳으면 두 남녀의 기분도 다소 변하지 않을까 하고 은근한 기대를 했는데, 어찌됐든 제 핏줄을 타고난 제 손녀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기대 밖이었습니다. 사위부부가 돌보지 못하는 아이를 전들 어떻게 합니까.”
“그렇겠죠. 그럼 양자로 준다는 말이 되겠군요.”
“여러 가지로 잠도 못자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길 밖에 다른 길은 없을 것 같습니다.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만, 저로서는 가엾기도 하고 한편 미련도 있습니다만…… ”
“혈압이나 재어 볼까요?”
“절요?”
한 박사는 혈압계를 들어 고혜련이라는 노부인의 혈압을 재었다.
최고 215, 최저 105였다.
“200은 안 되지만 그 근처는 됩니다.”
한 박사는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지금은 상당히 좋아진 편입니다. 이 아이를 데리고 오던 날은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그래도 아이가 있으니 푹 쉴 수도 없고, 꼭 악몽 같은 날이었습니다.”
“노부인,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앞으로의 일은 결정하지 말고 일단 저희 병원에서 아이를 맡아 보겠습니다. 신생아실에서 간호사들이 키워 보지요. 그 동안이라도 노부인께서는 좀 쉴 수가 있을 것이고 혈압도 내리도록 하십시오. 양자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 그렇게 되면 키울 생각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보다는 오히려 행복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한 박사는 그 말에는 어떤 자신이 선다는 듯이 말했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이젠 지쳤습니다.”
한 박사는 아이의 옷을 벗겨 보았다. 여위고 말라서 얼굴은 역삼각형이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눈만 커 보였다. 코가 높은 아이였다. 짓무른 엉덩이도 아직 낫지 않고 있었으며 노부인이 발라준 듯한 하얀 가루약이 묻어 있었다.
“혈액검사는 나중에 하지만…… 이름을 짓지 않았군요. 이름이 뭐라고 합니까?”
“조한양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한양이라 지었습니다.”
노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한 박사는 시선을 유리창 밖으로 돌리며 하늘을 한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장마가 지나가자 병원은 한결 밝고 명랑해 활기에 차 있었다. 한 박사는 그 이유가 날씨 탓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한 박사가 수술실 앞을 지날 때였다. 오후에 있을 제왕절개수술 준비를 하고 있는 간호사들의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 한양이 좀 보고 와야겠어. 하루만 못 봐도 보고 싶어 죽겠지, 뭐니.”
“얘좀 봐! 빨리 갔다 오렴. 저 아이는 참을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니까.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도 난리 법석이니까.”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한 박사는 못들은 척하며 그 앞을 지나쳤다. 한양이가 이 병원 간호사들에게 이렇게 귀여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뜻밖이란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으레 그럴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한 박사의 병원에서 아이를 맡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의학상으로 신생아에게 여러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퇴원해서 집에 돌아가는 순간부터 신생아라도 결국 세균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병원에서나 집에서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고 한 박사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간호사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문병객, 산모, 심지어는 간호사, 의사들까지도 모두 세균 투성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는 올바른 간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양이가 보통 아이와는 달라서 좀 별난 아이라는 것은 이 병원에 온 그 날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한 박사는 이 병원에서 출산한 신생아처럼 한양이의 혈액검사를 하기 위해 채혈을 했다. 발바닥을 메스로 째도 한양이는 얼굴을 찡그리기만 했을 뿐 울지는 않았다.
궁둥이가 젖었다, 목이 마르다, 배가 고프다, 덥다, 춥다, 하는 이 모든 표현을 아기는 소리를 내어 우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양이는 지금껏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이 없다.
“선생님, 이상하지 않나요? 이 아이는 벙어리인가 봐요.”
간호사들은 한양이를 번갈아 안을 때마다 말하곤 했다.
“아이가 귀머거리나 벙어리여도 울기는 하는 거야.”
“어머, 정말 그렇지요.”
“너무 편애하는 것 같은데······ 한양이만 안아주고.”
한 박사는 간호사들에게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한양이는 너무 귀여운 걸요.”
“울지 않고, 애먹이지 않으니까 그렇지? 얌첸데.”
“어머, 세상에······ 아니예요!”
한 박사는 이 병원에 보육원을 개업한 것도 아닌데······ 하고 한양이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냉정한 생각도 들었다. 아무 관련도 없는 늙은이의 외손녀가 낳은 아이의 장래까지 지기가 염려할 것은 없지 않나싶은 때도 있었다.

한양이의 생가에서는 잘 키워 주든지 말든지 월 10만원에 맡아준 집이 있었는데도 주책없는 늙은이가 나타나서 제 마음대로 데리고 갔다고 화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늙은 것이 잠자코 있을 일이지 알게 뭐람, 할런지도 모른다.
“선생님, 우리 한양이, 엉덩이 좀 보세요. 깨끗하게 나았지요? 한 번 봐주세요.”
자랑거리가 생겼다 하면 젊은 간호사들은 한양이를 안고서 귀여워하고 있었다.
목욕을 시키고, 약을 바르고 하며 정성을 들여서 그런지 짓물렀던 엉덩이는 눈에 띄게 건강한 피부가 되어갔다.
그래도 한양이는 소리 내어 우는 법이 없었다.
소아과 전문이 아니라서 알 수는 없으나 울지 않는 아이를 본적은 없는 듯싶었다.
선천성인 농아라도 울 터인데, 한양이만은 소리 내어 울지를 않았다. 일말의 우려가 없는 바도 아니다.
가령 1년 정도 지난 아이라면 울지 않는 이유로 심리적인 원인이 개재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울 때마다 시끄럽다고 구타당한다면 무서워서 울지 않게 된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생후 2개월밖에 안 된 젖먹이에게 그런 심리적인 요인이 있을 수가 없다. 소리 내어 울지 않으면 오히려 한층 더 가엾게 보이는 것이다.
한양이는 정말 울지 않는 것인지, 울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울고 있어도 소리를 못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증거로 가끔 소리 한 마디 없이 커다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는 때가 있다.
“아이, 가엾게도. 한양아, 얼마나 혼이 났니? 전에는 울면 매 맞았어? 병원에서는 괜찮아. 울어도 상관없단 말야. 마음 놓고 큰소리 내어 엉엉 울어 봐.”
간호사들이 쓰다듬어 주며 귀여워하고 있었다.
“그래, 어디 한 번 웃어 봐. 옷을 수 있을 만큼 컸잖아. 한양아, 한양아!”
확실히 그렇다. 다른 아이라면 벌써 소리를 내어서 웃어도 될 때가 되었다.
한 박사는 한 번 고혜련이라는 노부인 집에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어떻습니까, 그 후?”
“고맙습니다. 혈압은 좀 내려서 안정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아이를 맡기고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요즘은 갑자기 감기가 들어서······”
목소리가 변해 있었다.
“찾아뵈어야 될 텐데······”
“한양이는 잘 크고 있습니다. 엉덩이도 깨끗하게 나았고 간호사들도 무척 귀여워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남에게 보낼 아이라면 부인께서는 아예 보시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정이 들면 곤란합니다.”
그 무렵이다.
김상기라는, 병원에 자주 드나드는 전기공사업자가 어느 날 대기실에서 어물어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한박사가,
“우리 병원에서 전기수리라도 부탁한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선생님께 좀 의논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잠시라면 지금이라도 되겠습니다. 진찰실로 들어와요.”
“그렇습니까?”
한 박사는 아무도 없는 진찰실로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시죠?”
“언젠가 포항에 시집을 간 제 누이의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었죠?”
“알고 있어요. 외아들이 죽었다는 그 분 말씀이죠?”
한 박사는 기억해 냈다.
“아직 누이는 서른다섯인데, 또 낳을 수 있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아직 소식이 없어요. 요즘은 초조해져서 그런지 약간 노이로제 기분이 되고 있다더군요. 양자를 들이면 시샘을 해서 아기가 생긴다나요. 그래 지난번에 의논을 해 왔습니다. 아이는 수박 따위 열매도 아니고, 아무거나 얻어올 수도 없고······ 그렇잖습니까? 선생님.”
“그렇게 해서 만일 아이가 생긴다면 얻어온 양자가 방해가 될 텐데.”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 전부터도 둘 이상 갖고 싶어 했고 아이가 생기면 양자 온 아이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며 새로 생긴 아이보다 더 귀여워질 것이라 하고는 있습니다.”
한 박사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아이는 줄 사람이 있을까요?”
“글쎄요. 없지는 않겠지요. 현재 우리 병원에서 맡아 기르고 있는 아이가 한 명 있기는 하지요.”
“정말입니까? 남자 아이입니까, 여자 아이입니까?”
“여자 아이입니다.”
“누이도 그러더군요. 얻는다면 여자 아이가 좋다고 말입니다. 남자 아이라면 아무래도 죽은 아이가 생각이 나서 안 될 것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양자로 여자 아이를 바라는 심정은 그 아이의 장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커서 혹시 깡패가 되거나 아니면 혹시 말썽을 일으키는 남자가 될는지 염려해서다.
여자 아이라면 적어도 살인이나 강도짓은 못할 것이고 인생이 빗나가도 기껏해야 절도나 매춘 정도일거이라고 마음속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누이에게 말해도 될까요?”
“괜찮을 겁니다.”
“곧 상의해서 회답을 드릴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양자로 주는 걸 잠시 보류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것으로서 양자가 결정된다면 극히 쉬운 일이라고 한 박사는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운이라는 것도 있다. 한양이가 좀 더 건강해지면 박연옥 여사에게 의논해 볼까 궁리해 오던 중이었다.
박 여사가 주선하는 일은 아마 외국인에게 주게 될 양자일 것이다. 한 박사는 이 점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전기공사업자인 김상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선생님, 누이에게 전화를 했더니, 퍽 좋아 하더군요. 잘 됐다면서 말입니다. 곧 오겠다고 하기에 조금 기다려 보라고 했습니다. 제 매부 되는 사람은 전화로 혈통은 좋은가 어떤가 묻기도 했지만.”
“혈통이라면 나 정도로 확실해요. 북경원인 이래로 만세일계의 족보를 가졌으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 농담은 뒤에 하시고, 부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좀 안 됐지만, 그걸 꼬치꼬치 따진다면 양자로 줄 수가 없는데······”
한 박사는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네?”
“댁에서는 일방적으로 아이를 골라 가지려고 하지만 아이 역시 양자로 들어갈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있어요.”
“아니, 선생님, 우리는 특별히 고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특별히 나쁜 유전병이나 없는지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그런 것쯤은 알아 두는 것이 좋을 듯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
“선생님,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면 누이나 매부에게 선생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양자를 알선한다면 나는 조건 없이 하고 싶어 그렇습니다. 만일 제부모의 자식이라면 어떠한 불구라도 무조건 키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매부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간호사들이 김상기와 한 박사의 대화를 곁에서 들었는지
“선생님, 한양이를 곧 양녀로 보낼 거예요? 적당한 양부모가 나타나면요.”
“금방은 안 돼. 아직 여위어 있잖아. 좀 더 건강해져야지.”
“한양이가 양녀로 가고 없으면 어쩌지!”
이나미가 동료 간호사인 노영숙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데도 주고 싶지 않아요.”
“언제까지라도 이 병원에서 보육할 생각인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한 박사는 좀 언짢은 일이 있으면 어두운 기분에 사로잡히는 수가 많은데 젊은 간호사들의 이런 반응으로 마음이 조금은 밝아지는 듯했다.
이런 반응마저도 없다면 온종일 우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김상기가 자기의 누이 부부가 마음을 고쳐먹고 무조건 한양이를 양녀로 맡고 싶다고 하면서 찾아 왔을 때 한 박사는 시험 삼아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해 보았다.
“김상기씨, 그런데 아무래도 양녀로 데려 가기에 지장이 생겼단 말씀이야.”
“무슨 말씀이시지요?”
“그게 말예요, 지금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서 야위어 있지요. 현재로는 다소 걱정이 됩니다. 적어도 2, 3개월은 기다려 주어야겠습니다.”
“네······?”
“이 앤, 어찌된 셈인지 통 울지를 않아요. 어쩌면 벙어리인지도 모르지요, 이 점 양해하고 데려 간다면 기꺼이 드려도 좋은데······”
“그래요? 그건 좀······ 어쩌지요. 누이는 아주 좋아서 지금이라도 전화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미안하군요. 그래도 좋으시다면 양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박사는 다소 짓궂게 하지 않았나 싶었지만 김상기에게 대답을 기다리는 척은 했으나, 이미 김상기의 대답을 마음속으로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 날 오후 김상기가 전화를 걸어왔다.
누이에게 의논했는데 그토록 여윈 애를 얻어 와서 만일에 잘못된 일이라도 생겨나면 피차 곤란하니 이 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다음에 좋은 기회가 생기면 꼭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좋습니다. 아무튼 미안하게 됐군요. 그렇게 하시지요.”
한 박사는 수화기를 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수년 전의 일이다.

한 박사는 딸 유리에게 시달리다 못해 진도견의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사 온 일이 있었다.
사온 2, 3일 후에 강아지는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강아지를 타월에 정성스레 싸서 강아지를 사 가지고 온 집에 데리고 갔다.
그 개집 주인은 상태를 보기위해 당분간 두고 가라고 말했었다.
그후 2, 3일 뒤에 이 강아지는 상태가 아무래도 좋지 않은듯하니 같은 진도의 실한 놈과 교환해 가라는 연락이 왔다.
아내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유리는 조금 생각하더니 ‘난 싫어’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 강아지는 ‘복실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 강아지만이 복실이이고 다른 강아지는 ‘복실이’가 아니다 라는 말을 했다. 한 박사는 듣고만 있었으나 딸아이의 말이 맞다 고 생각했다.
지금 이 일도 그 강아지에 비교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개집 주인의 처사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았다.
김상기씨의 누이 부부는 체면치레로 만일의 경우를 들먹이고 있으나 그렇다고 살이 좀 오르고 건강해지거든 주십시오, 란 말은 하지 않았다.
병이 있는 강아지를 다른 것과 바꿔 주시오. 하는 사람의 심리처럼 벙어리인지도 모르는 아이는 얻어 갈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날 밤이다.
아내인 이윤미는 집에 없었다.
한 박사는 혼자서 잡지를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시선이 머문 조그마한 기사를 발견했다.
그것은 지난번에 시어머니와 함께 왔던 모진선이라는 임산부의 신원이 확실해진 것이다.
한 박사에게는 제약회사의 P·R잡지가 보내져 오는 경우가 많다.
잘 읽지도 않고 그대로 팽개쳐 두는 일이 많은데 그 날은 우연히도 서울제약이라는 회사에서 발간하고 있는 ‘건강통신’ 이라는 P·R잡지의 사진 면에 낯익은 사진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부부건강탐방’ 이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나이가 많은 저명인사의 부부를 탐방하여 건강이나 취미 같은 것을 실은 기사였다. 거기에 그 모진선의 시어머니인 노부인이 남편과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해변을 조깅하는 시진이 실려 있었다.
오경석씨는 예순넷, 한국조선의 부사장을 지냈고, 그 부인인 김선미씨는 쉰여섯 살로 한국가스공사 사장인 김철수씨의 누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경석씨의 누이인 오은경씨는 전에 칠레 대사를 지낸 고우영씨의 부인이 되고 고우영씨도 제일고의 후배가 된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스포츠로 몸을 단련한 스포츠맨들이다.
김수철 씨는 검도, 오경석은 마라톤, 고우영 씨는 승마로써 모두 건강을 자랑한다고 씌여 있었다.
“남편과 같이 마라톤을 항상 하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에 김선미 씨는,
‘집안일에 쫓겨서 마라톤 같은 건 하지 않아도 피곤해서요. 또 나이도 나이라서’ 라고 대답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 집안이었구나 하고 한 박사는 생각했다.
경제인이라면 오경석이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사람이군.‘ 하고 알고 있을 듯 하지만 한 박사와 이 방면은 서로 인연이 먼 이야기였다.
그런 집안의 며느리라면 더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서울의 병원에 간다면 소문이 나고 남의 눈에 뜨일 염려가 있어 일부러 이런 시골의 병원을 찾아 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한 박사는 생각했다.

그 이튿날 아침,
한 박사는 외래진찰실에서 뜻하지 않게 모진선이라는 부인의 전화를 받았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역시 렌트겐 일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이 번은 없애 버리기로 본인도 납득을 했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한 사정이니 하루라도 빨리 해 버리는 것이 좋을 듯해 어느 날쯤 입원을 해야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마 5일 정도면 충분할 듯합니다만······"
"지금 입원실은 있습니까?"
"언제라도 좋습니다."
병원이 있는 이 해안지방에도 여름이 와 있었다.
한 박사는 그날 처음으로 수영이라도 해 볼까 마음먹었다.
7월 초순 바닷물이 아직 찰 때, 8월이라도 파도가 있는 날이나, 바닷물의 수온이 내리는 9월에 대비하기 위해 한박사는 월미도 앞의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월미도 팬션의 풀장 회원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도 풀장에 안 가?”
한 박사는 아내에게도 함께 갈 것을 권했지만
“난 안 가요. 수영 같은 건 싫어하는 줄 잘 알잖아요.”
아내에게는 이런 식으로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한 박사는 혼자 수영복과 타월을 챙겨 차를 몰고 풀장으로 갔다.
이 곳에 수영을 하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요트맨 들이다. 이곳에서는 요트를 수리도 하고 관리도 하고 있다.
풀은 안쪽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한 박사는
“아가씨, 안녕? 올여름도 잘 부탁해.”
얼굴이 익은 접수를 맡은 아가씨에게 인사를 건네고, 옷을 벗고 샤워도 하지 않은 채 풀 사이드로 걸어서 나갔다.
샤워를 한 이상으로 집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왔기 때문이었다.
물은 25미터의 L자형이었고 아직 학교가 방학 전이라서 그런지 한산했다. 방학만 되면 한 박사같은 어른은 들어설 틈도 없이 학생들로 꽉 차고 말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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