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순간인거야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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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순간인거야 <86>
  • 한지윤
  • 승인 2019.07.1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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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한 박사는 풀사이드에서 형식적인 준비운동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풀로 뛰어들어 크롤로 25미터를 헤엄쳐 보았다.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숨이 찼다. 한심스러운 일이다. 여겨져 풀사이드로 올라와 의자에 비스듬히 누웠다. 혀를 빼물고 한여름의 개처럼 헐떡이고 있을 때였다.
머리위에 달린 확성기에서
“한국일 원장님, 한국일 원장님. 지금 풀에 계시면 댁으로 전화해 주십시오.”
하고 방송이 흘러 나왔다.
한 박사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타월을 걸치고 풀사무실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전화를 걸어서 병원의 전화번호를 불렀다. 두어 번 신호가 가자 접수부의 여자 직원이 나왔다.
“나 찾았어?”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수석간호사님을 바꿔 드리겠어요.”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자 조금후에 민선경 수간호사가 전화에 나왔다.
“무슨 일이지요?”
의사란 직업은 자기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좋은 직업은 아니다 싶었다.
“선생님. 민선경입니다. 선생님 안 계실 때 최아라 임산부가 조금 전에 급히 분만했다고 가족 되는 분이 데리고 왔습니다. 5분전에 분만을 했습니다.”
최아라라는 임산부라고 했지만 기억에 없었다. 민선경 간호사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에 비로소 그 산모가 이상구의 생질녀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 다른 증세는 없어?”
“별다른 증세는 없습니다. 체중은 2키로 850그램이었습니다."
난청에다가 지능도 조금 모자라는 임산부라서 분만 중에 한 박사 자기의 지도가 없으면 어렵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아이란 어떤 여자라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예가 생긴 것이다.

“잘 됐는데. 그럼 곧 가지.”
“이상구 씨라고 하는, 아기의 큰아버지 된다는 분께서 조금 전에 전화를 했었습니다.”
“······? 산모의 외삼촌 되는 사람일 텐데.”
“그렇습니까? 선생님께 잘 부탁드린다고 전화로 얘기하더군요.”
한 박사는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수고하라고 말하고 풀 쪽으로 걸어서 나갔다.
빨간색 비키니를 입은 아가씨가 장발머리의 청년과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다.
한 박사는 이 화사한 밝은 여름 햇살 아래서 아이러니컬한 드라마가 자기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도 진행되고 있었구나 싶었다.
가령 한 박사가 그 때 이상구 의원의 ‘뜻을 받아’ 부모도 바라지 않고 국민의 세금의 방대한 액수를 소비시킬 가능성이 농후한 저능아이를 아무도 모르게 없애버릴 밀약을 이상구와의 사이에 맺었었다고 한다면, 물론 이럴 경우는 옆에 입회한 간호사도 모르게 능숙하게 해 치워야 될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구 의원의 의도에 동정하고 합리성이 있으므로 협조하겠다고 했다면,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것이 오늘에 와서 실현되지는 않았다.
난청으로 지능도 낮은 산모는 한 박사의 손을 빌지도 않고 아기를 순산했다 누군가 이런 인간의 서툰 행위를 조소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계획을 바보 같다고 조소하는 것은 신의 조소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 박사는 병원에 돌아오자마자 곧 신생아실로 직행했다.
아이는 약간 작았으나 예쁘다고 할 수 있는 여자 아이였다.
한 박사는 아이의 옷을 벗기고 머리에서 발끝가지 천천히 점검해 보았다. 아무 곳에도 이상은 없었다. 그 길로 병실로 가서 산모인 이상구 시의원의 생질녀를 만났을 때도 극히 자연스럽게
“마침 병원에 없어서 미안합니다. 해산이 빨라서 입회하지 못했으나 이상 없는 귀여운 아기를 낳아서 다행입니다.”
라고 사과와 축하의 말을 겸해서 했다.
“덕택으로······”

산모를 따라온 보호자는 한 마디 할 따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박사는 귀가 좀 먼 산모인 최아라에게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면서,
“기분이 좋아요?”
하고 물었다.
최아라가 씽긋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는 그 표정이 언젠가 박연옥 여사의 편지에 쓰였던 브라질의 정신박약의 미혼모의 이미지가 최아라의 표정과 함께 뇌리에 겹쳐 떠올랐다.
한 박사가 진찰실로 돌아가려 할 때 신생아실의 이중으로 된 문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에 발을 멈추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뭐지?”
무얼 웃으며 떠드나 싶어 물어 본 것이었다.
신생아는 조용한 곳에 재워 두어야 하는 법인데 옆에서 웃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선생님, 좀 오셔서 보세요.”
그 음성은 간호사들이 한 박사를 부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즐거운 비명에 가까운 것이라고 느껴졌다.
한 박사는 신생아실로 들어갔다. 병동 담당의 젊은 간호원들도 함께 있었다. 외래 담당인 이나미 간호사와 노영숙 간호사도 와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박사는 신생아실의 입구에 서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선생님! 한양이가 웃었어요.”
간호사들은 한 박사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아니고 즐거워 어쩔줄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정말이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한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줄지어 놓여져있는 침대의 끝에서 두 번째인 한양이의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한양아! 선생님이시다. 웃어봐. 크게 힘껏 말이야.”
“힘껏은 뭐예요? 힘껏은 오히려 윤동순 언니네.”
“그렇게 힘껏 하면 웃지 못해요. 안 그래요?”
젊은 간호사들이 제각기 떠들고 있는 가운데 한 박사와 한양이는 시선이 서로 멈추었다.
한양이는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한 박사의 눈을 바라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정식으로 부탁드릴 때가 왔는데요.”
그날 밤 한 박사는 박연옥 여사에게 전화를 했다.
“누님, 난 지금 취해 있어요. 그래도 제정신입니다. 비즈니스에는 말짱하니까.”
한 박사는 오랜만에 어머니나 누님에게 하는 응석 같은 기분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두 사람, 아니 한 사람이라도 좋아요. 얻어가 달라는 겁니다.”
“응, 언젠가 이야기했던 아이 말이군.”
“맞습니다. 그 때는 한 사람. 지금은 두 사람이 됐지요.”
박 여사는 한 박사의 말이 아이들처럼 순진하다고 느껴졌는지 웃고 있었다.
한 박사는 이영신 딸이 죽기전에 그녀가 낳은 아이를 부탁한 기억은 있었지만 그것이 유야무야로 지나간 후에 몇 사람이나 부탁을 했는지 술 취한 자기로서는 기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아무래도 좋은데, 도대체 몇 사람이나 돼?”
“토마스란 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한 명, 오늘 오후에 낳았어요.”
“그렇다면 곧 미스터 토마스에게 연락해 볼께.”
“그리고 이건 고등학교 학생끼리의 사이에서 태어난, 키울 사람이 없는 아이가 하나, 둘 모두 여자아이. 고교생의 아이는 우리 병원에 올 때는 여위어서 부탁할 수가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웃고 해서 이제 줘도 될 것 같아요.”
“그럼, 이 아이도 미스터 토마스에게 물어볼게.”
그리고 박 여사가 물었다.
“한국일 박사. 화풀이로 술 마셨어?”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한 박사는 부정을 했다.
“극히 냉정하게 철학적으로 마시고 있어요.”
“그렇다면 좋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한 박사는 공허감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박 여사에게 속을 들여다보인 것 같기도 했다.
한 박사는 민선경 수석간호사에게 만일에 최아라씨의 모유가 나오지 않거든 아이에게 무리해서 젖을 빨리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한 번 젖을 빨리고 나면 아이를 떼주기가 어려운 일이다. 정이 든 후에 아이를 떼어간다는 것은 못할 짓이다 싶어서였다.
토마스란 사람이 양자로 데려 간다면 아이는 그 얼마간 할머니에게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한 박시는 우울해졌다.
여자란 아이를 낳으면 젖이 불어온다. 아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자연히 샘솟는 생명의 힘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박 여사의 대답은 10분후에 전화로 걸려 왔다.
“지금 미스터 토마스에게 연락을 취했더니 아기의 탄생을 축하한대요.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정말이겠죠. 이것이 개발도상국가의 일이라면 나도 머리를 써서 돈을 좀 벌어 볼 텐데 말예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의사 선생님께서 말을 꼬아서 하니 나 같은 센스가 둔한 사람은 알아  들을 수가 없단 말이야.”
“누님. 잘 들어요. 돌려서 말하는 건 아니니까. 난 외국의 일은 잘 몰라요. 내 아는 녀석이 월남에게 북쪽으로 밀고 내려오기 직전에 말예요. 여자를 샀다나······ 아주 젊은 미인이라서 100불을 달라고 했다나요.”
“100불이면 비싼 게 아니야.”
“응, 맞아요. 그 녀석도 100불이면 비싼게 아니라고 생각했대요. 사람이란 여행을 하면 좀 통이 커지는 편이지. 그래서 100불을 주었더니 열일곱, 여덟 살로 보이는 아주 가냘픈 소녀를 데리고 왔더래요.”
“100불?”

“그 녀석도 이런 여자로서는······ 그런데 했다나. 이건 이미 약속한 거니, 어떻게 해. 그 소녀를 데리고 온 남자가 소녀의 아버지였대요. 100불 받았으니 이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도 배불리 먹일 수 있고 편하게 지낼 것이라고 하더래요.”
“그런 이야기라면 옛날부터 여기저기에서 하던 이야기예요.”
“그 녀석은 놀라서 그만 사는 것을 취소한다고 하고 되돌려 보냈다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까운 일을 했다고 후회하고 있지요. 그런 미인을 데리고 와서 밤에라도 옆에 두고 살면서 빨래라도 시켰었다면 하고······”
“어머머,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뻔뻔스럽게 그런 남자에겐 연극에라도 나오는 폐병의 말기증상인지 모른다고 겁주어야 돼. 그런 사람에게는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 토마스란 사람, 어떤 아이라도 양자로 들인다는 데는 놀랐는걸요.”
“미스터 토마스에게는 남자 아이가 많아. 만나보면 알지만 토마스란 사람 스케일이 커요. 얻어 가려면 가엾은 아이일수록 좋대요. 그런 아이는 자기가 얻어가지 않으면 얻어갈 사람이 없다는 그런 생각이지.”
“골동품 쟁이 같은 사람인데.”
“한 박사. 재미있는 말씀만 하시는데······ 이건 정말 이예요. 다른 사람이 싫어할수록 신의 손길이 많이 간 아이라는 거예요. 그런 아이를 양자로 얻어가는 것이 자기 뿐 이라는 자부심도 있는 모양이야.”
“그 자부심이 평생을 갈까요?”
“그렇담, 직접 확인해 봐요. 상관없다면 닥터께서도 직접 와서 이야기해 봐요. 내일 우리 집에 오기로 했으니까 말이야.”
“그래 볼까요? 그런 사람과 정면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부담스러운데······”
“부담스럽다니, 뭐가? 거짓말 한다면 모르지만 사실을 정직하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아닐까?”
다음날 오전에 모진선 씨는 그 남편이란 사람과 함께 와서 입원을 했다.
남편인 나오명이라는 남자는 얼핏 보기에는 좀 신경질적인 데는 있었으나 키가 큰 호남아로 보였다.
집안도 상류가정이라면 외견상으로 사위 후보로서 손색이 없으니, 그 부모는 ‘좋은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꿈꾸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그 취향과 매력이라는 것은 이것 또한 룰대로 가지 않는 법이다.
나오명이라는 남자가 그다지 미인도 아니고 재기 발랄하다고 볼 수도 없는 여자를 좋아 한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 박사는 오늘 비로소 모진선씨의 얼굴을 바로 뜯어보았다.
즐거운 곳에 놀러온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약간 부은 듯 다소곳하게 아래로 내려뜬 눈은 결코 한 박사나 그 남편을 바로 바라보는 일이 없었다.
앙금 같은 것을 마음 속 깊이 감추어 두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
“그럼, 여기 동의서에 두 분이 서명 날인해 주십시오. 밟아야 할 절차입니다.”
한 박사는 두 사람 앞에 펼쳐놓은 동의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임신중절수술에 동의한다는 뜻이 쓰여져 있는 형식적인 서류다.
“자기가 써요. 난 아기를 없애기 싫으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던 한 박사는 모진선 씨의 말에 눈을 돌렸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각자가 쓰게 되어 있어.”
남편은 조금 주저주저하면서 더듬거리듯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박사는,
“나는 어떻든 좋습니다. 이런 일은 두 분의 의견을 조정해 주셔야 합니다. 수술을 한 후에, 만일 그건 내 의사가 아니었다 하게 되면 곤란하니까요.”
결국 남편이 ‘배우자’란에 먼저 서명을 날인하고 나니 모진선 씨도 할 수 없다는 태도로 ‘본인’란에 서명하고 난 후에 남편이 꺼내준 도장을 찍었다.
“부인의 경우는 보통수술과 좀 틀립니다. 지금이 자궁구가 제일 열기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적어도 한 3일 가량 두고서 서서히 열어야 될 것 같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라미나리아 라는 것을 넣는 처치를 해야 합니다. 자연적으로 자궁구를 여는 것입니다.”
보통은 환자에게 설명을 잘 하지 않지만 어두운 표정의 모진선 씨를 보니 이정도의 설명은 해 주어야 될 것 같았다.
“완전히 끝날 때까지 며칠 정도나 입원을 해야 됩니까?”
남편인 나오명이 물었다.
“약 3일 정도 있다가 진통을 시켜 보겠습니다. 경산부가 아니라서 자궁을 열기가 힘이 듭니다. 상처를 내지 않아야 되니까요.”
“그런 처치는 임산부에게는 고통스러운가요?”
한 박사는 볼펜 뒤끝으로 차트를 두드렸다.
“이건 일종의 출산입니다. 그러니 아픔이 없이는 아이가 나오지 않습니다. 개인차도 있고 체질도 문제가 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수월하게 하기 위해 충분한 날짜를 잡는 것입니다.”
“선생님만 믿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박사는 모진선 씨에게 입원실에 가서 가지고 온 물건을 정리하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있으라고 일렀다. 이 것은 처음 입원환자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마음의 안정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임신중기의 수술이라는 것은 의사로서는 내키지 않는 수술이었다.
몇 분에서 끝날 조기 수술에 비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일이 많다. 순조로운 츨산보다 더 까다로운 수술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컬한 일이 그 날 1시 조금 지나서 일어났다.
유다영이라는 환자가 조산의 증후가 있다고 해서 입원해 왔다. 임신 29주로서 이미 8개월로 접어들어선 것이다.
유다영은 곡물집의 며느리로 시어머니가 입원하는데 보호자로 따라왔다.
“선생님. 무슨 수를 쓰던지 조산이 안 되게 할 수는 없을까요?”
시어머니는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전에 두 번이나 유산한 적이 있죠?”
유다영은 경관무력증이라고 해서 자궁경관이 힘이 없는 병적 체질이었다. 두 번의 유산은 한 박사의 병원에서 한 것은 아니고 이 번 임신 때부터 이 병원에 온 것이다.
“네. 그래서 이 번에는 금이 간 항아리 조심하듯 주의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한 달 동안은 거의 누워서 지냈지요.”
“지금  상태로 보면 역시 위험하군요.”
“만일 지금 출산한다면 아이에게 지장은 없겠습니까?”
“글쎄요. 29주인데. 40주 동안 모태 속에 있어야 될 태아가 4분의 3정도 밖에 뱃속에 있지 않았으니 일단은 미숙아이지요. 그래도 낳을 때에 체중이 1키로 500그램 이상만 되면 되는데 지금으로 봐서는 그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유다영의 아이는 그 날 오후 세 시 조금 못되어 출산이 되었다.
환자와 그 시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병원에 왔을 때는 벌써 내자궁구에서 태반이 노출돼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사내 아이로서 1키로 550그램이었다.
“1키로 550그램인가? 한계를 채웠군. 50그램은 덤으로 붙인 셈인가.”
한 박사는 민선경 수석간호사에게 체중의 보고를 받자 산모가 들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기는 아주 약한 울음소리를 냈다. 분만실 앞에서는 시어머니와 그 아들인 산모의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박사가 밝은 얼굴로,
“축하합니다. 아들아이입니다. 지금 보육기에 넣고 있지만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
하고 말하자 산모의 남편은,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고 정중한 인사를 했다. 시어머니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하고 한 박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으나 손자의 출생을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한 박사가 오후의 외래환자의 진찰이 끝나고 저녁 때 회진시 입원실에 들렀을 때 모진선 씨는 침대에 옆으로 누워서 영화집지를 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배가 아픈가요?”
“조금 뒤틀리는듯 하지만 별 것 아닌 것 같아요.”
“남편께서는 집에 가셨습니까?”
“네. 여기 있어도 할 일이 없다면서 나갔어요.”
입원한 후 이틀 정도는 대개 이런 정도에서 끝이 난다.
모진선의 남편인 나오명은 온순하다는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아내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고 해도 남편이 이정도로 너그럽게 이해하고 있다면 이들 부부는 재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사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모진선의 입원실 다음 병실이 유다영의 입원실이었다. 한 박사가 그 방으로 갔을 때는 시아버지인 쌀집 주인도 와 있었고 유다영도 가족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주머니, 어때요?”
“네. 덕택으로······”
시어머니가 대신 대답을 하자 며느리도 옆에서 웃고 있었다.
“배가 아프거나 하지 않으세요?”
“아녜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기는 체중 미달이라 안심은 안 되지만 지금은 건강한 편입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박사가 입원실 밖으로 나오자 시어머니가 전송 겸해 복도까지 따라 나와서는,
“선생님, 잠깐.”
하고 속삭이듯 소리를 낮추어,
“선생님, 저기까지······”
입원실 바로 앞에서는 입원환자에게 들릴 염려가 있어서 그런지 한 박사의 가운자락을 붙잡듯이 하는 태도로 앞서서 걸어갔다.
“선생님, 이런 이야기는 남편이 말씀드려 보라고 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미숙아로 출산된 아이를 보육기 안에서 산소를 너무 주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던데 상관없을까요?”
“꼭 그렇다고는 할 수는 없는데······ 하지만 지금 아이의 호흡이 다소 빠른 편이지요.”
한 박사는 이 정도만 말하고 그 이상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28주에서 36주 사이에 출산한 아이들보다 더 빨리 출산된 27주까지의 신생아는 뇌실내출혈은 적은 대신에 폐초자막증이라는 것을 일으키기 때문에 당연히 많은 산소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산소를 주지 않고는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보죠?”
한 박사는 시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미숙아망막증은 산소의 투여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망막, 특히 그 혈관의 미숙성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산소를 투여하면 동맥혈산소분압이라는 것이 상승하게 되어 미숙한 망막 혈관은 수축한다.
그 결과 혈관의 끝부분의 폐쇄되어 그 주변의 망막은 무 혈관으로 되고 만다. 이 기간 동안 무 혈관 영역의 망막은 맥락막에서 산소의 공급을 받고 있으나 동맥혈산소분압이 저하되면 그 공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저 산소 혹은 무 산소 상태로 되어 많은 산소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신생혈관이 새로 생겨 미숙아망막증이 발생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선생님. 저희 집에서는 손자는 처음 이예요. 꼭 필요는 하지만요. 눈이 먼 아이가 되어 버리면 아이도 가엾지만 우리도 피곤합니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눈이 나쁘지 않게 살릴 수는 없을까요?”
만일 장님이 된다면 차라리 살리지 말라는 저의가 분명하다. 그러나 의사로서 어떻게 그런 일을 제멋대로 조절할 수가 있는 일인가.
눈이 장님이 되거든 살리지 말아달라는 것은, 좋은 아이라면 그 집안의 손자로서 자격을 얻을 수가 있고 장님이라면 그 집에는 필요가 없는 아이라는 것이 된다.
“아주머니, 유감이지만 제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 박사는 이런 경우에도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예사로 받아들이는 자기 자신을 문득 새로 발견한 것 같았다.
“그렇습니까? 안 되는 일인가요? 그 정도는 의사선생님들은 하실 줄 알고 있었는데요.”
시어머니인 쌀집 아주머니가 집요하게 강요해 오기 때문에 한 박사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나도 안 되는 일이니 다른 의사도 안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때다. 다행히도 한 박사가 이 곤경에서 해방이 될 좋은 계기를 만들어 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시의원인 이상구씨가 계단을 올라오면서 아는 척 눈인사를 했다. 한 박사는,
“잘 됐습니다. 순산을 해서······ 이상구 씨.”
하고 한 박사가 먼저 말을 건넸다. 쌀집 아주머니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피하듯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수고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상구는 조금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자리에 없었는데 뒤에 산모와 아이를 진찰해 보았습니다만, 모녀 모두 아무 이상이 없어 다행인 것 같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상구는 손수건을 꺼내 목에 돋아난 땀을 닦으면서
“지금 막 출산한 아이를 두고 말하기 거북스럽습니다만, 이 아이 양자로 얻어 갈 분은 없을까요?”
“그 일로해서 오늘밤 외출해 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쉽지는 않겠지만 한 번 알아보도록 노력해 보지요.“
하고 한 박사가 말하자,
“고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 박사는 이상구 씨가 “그 집은 어떤 집인가.”하고 물을 줄 짐작했으나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기대는 마십시오. 저도 자신은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어떤 사람이 나섰는데 혈통, 혈통하고 혈통을 따지는 집이 되어놔서······ 그런 집이라면 곤란합니다.”
“그건 그렇겠지요. 그런 집에서 데려갈 아이는 아니지요······”
“아무튼 결과는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상구 씨는 한 번 더 목덜미의 땀을 닦았다. 목의 땀을 닦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라고 한 박사는 생각해 보았다. ‘산모와 아이가 모두 이상 없다’고 말했을 때 이상구 씨는 수고했다고 인사말을 하면서도 땀을 닦았었다. 그것은 이상구씨의 속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더 확실하게 말한다면 이상구 씨는 갓난아이만이 아니라 지능이 낮은 산모마저 죽어 버렸으면 싶었을 것이다.
산모와 아이가 모두 죽어버린다면 아이의 조모가 되고 산모의 어머니가 되는 이상구 씨의 누이는 그 ‘가엾은 것이’ 하고 울 것이다. 그러나 이상구 씨는 귀찮은 것들이 없어졌다 싶어 또 땀을 닦을 것이다.
‘생명의 존엄’ 이라는 것은 자기의 형편이 좋은 인간이 살아 있을 경우에만 입으로만 말하는 편리한 말이다. 세상에는 살아 있어주었으면 싶은 사람도 있고 죽어 주었으면 싶은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나 그 판단의 기준은 대개 이해관계에 달려있는 것이다.
한 박사는 언젠가 전기공인 김상기에게 ‘친부모라면 불구의 아이라도 키운다’라고 말한 일을 후회했다. 왜냐하면 친부모일지라도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었다. <끝>


그동안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호(홍주신문 제596호)부터는 한지윤의 역사교육소설 ‘백마강에는 낙화암’이란 제목의 새로운 소설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 있으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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