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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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2>
  • 한지윤
  • 승인 2019.07.2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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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윤의 청소년 역사교육소설

첫째로 그 때의 풍속이나 나라의 규범은 왕후장상유종이라 하여 왕의 혈통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었다. 비류도 졸본왕의 혈통이라고는 하지만 집권왕의 혈통이 아니므로 지방 방백으로서 장수(將帥)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비록 비류가 장자이더라도 왕위로 세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온조를 세울 수도 없는 것이 주몽왕에게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특히 고대에는 장수의 혈통을 가지면 그 집안 대대로 장수를 계승하여 병사를 배워야 했다. 따라서 주몽왕은 소서노와 이십여년을 살면서도 후사를 계승할 태자를 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몽왕은 그 어머니의 가르침을 생각하여 그가 죽을 무렵에 예씨를 왕후로 삼았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던 것이다.
둘째로 장자인 비류를 왕위에 세우지 않고 유리를 왕위에 세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시대의 규범이 계승권은 장자에게 있었던 까닭에 천하의 여걸 소서노도 예씨에게 왕비의 자리를 양보했고, 또 비류와 온조는 태자를 유리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또다시 국가를 세운 후 왕위(王位)에 즉위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비류와 온조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비류와 온조가 다 같이 주몽왕의 생자(生子)라면 별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형제의 아버지가 다른 경우에는 정치적 측면을 크게 좌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장자인 비류가 왕위에 오르고자 할 경우, 아버지 신하였던 구(舊)신들과 규합하여 온조를 제압하려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왕위를 둘러싼 비류와 온조의 대결은 앞으로 국가의 장래를 분열시킬 우려가 있었던 까닭에 소서노는 주몽과 20여년을 살면서도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소서노는 심사숙고 끝에 온조를 옹립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던 것이라 하겠다. 이는 주몽왕의 후광(後光)을 생각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온조를 왕으로 세우기에 이르니, 비류는 결국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로 갔고 소서노는 온조를 이끌고 위례성에 도읍을 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셋째로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자 곧 동명성왕의 묘당을 세우고, 부왕(父王)의 통치이념을 국가의 이륜으로 삼은 것이다.
물론 새 나라를 세움에 있어서 고구려의 후광을 받지 못할시 열국(列國)의 침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에 밀려나온 처지이면서 만약 주몽 왕이 친아버지가 아니라면 사당을 세우고 통치이념을 이륜으로까지 삼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소서노가 아무리 주몽 왕과 오랜 세월을 살며 깊은 정이 들었다 하더라도 아들의 생부도 아닌데 남편의 사당을 세우라고 아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일국의 왕이 된 온조왕도 높은 기개와 품위를 지닌 군왕이며, 왕을 따르는 열 명의 중신 중에 족부 을음은 지식과 담력이 뛰어난 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온조왕이 만약 주몽왕의 친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동명성왕의 사당을 세울 수가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이 당시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과 역사의 기록으로 평가할 때 온조왕은 분명 주몽왕의 생자임을 알 수가 있다.
이상에서 말한 바, 소서노는 여성으로써 뛰어난 여걸인 동시에 가히 백제의 국모(國母)칭호를 받을 만큼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물론 소서노가 고구려 왕위를 계승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때의 풍속이나 규범을 존중한 것은 시어머니 유화의 압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서노는 왕가의 법도를 지키기 위하여 흔연히 주몽왕의 조강지처인 예씨에게 왕후 자리를 양보하였으니 그 점이 후대에 더욱 위대한 어머니로서 남게 했고, 사랑하는 남편과 고국을 등지고 그 곳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소서노가 옹졸한 여성이었다면 고구려는 왕위 계승을 놓고 큰 싸움이 일어났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소서노는 주몽왕이 생존해 있을 때 온조를 새 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한다는 것까지도 상론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주몽왕의 후광을 받고 있다지만 어찌 소서노가 오랜 세월을 두고 투쟁도 없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할 수가 있으랴?
이와 같은 전후의 사정을 상고할 때 백제의 건국은 소서노의 치밀하고 자상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소서노는 졸본인 연타발의 딸로 태어나서 우대왕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왕이 죽자 그녀는 막중한 나라의 대사(大事)를 한 몸에 지니고 이끌어 나가야 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 소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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