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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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3>
  • 한지윤
  • 승인 2019.07.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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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윤의 청소년 역사교육소설

그러자 그 시대의 혼란은 그녀 혼자의 힘으로는 종사(宗社)와 가문(家門)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곤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녀는 천하의 영걸인 주몽왕에게 접근하여 결혼을 했다. 이리하여 소서노는 고구려왕의 총애를 받는 왕비가 되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생애를 걸으면서도 그녀는 지극한 모성애로서 개국(開國)의 뜻을 굽히지 않고 백제를 건국하여 13년 동안이나 아들의 나라를 도왔다. 그런 후 온조왕 13년 3월 왕모(王母) 소서노는 일생을 마쳤다. 이에 온조왕과 중신들은 왕모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4년 후(기원전 2년) 4월에 국모의 예로서 묘사를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

이는 동명성 왕모 유화 태후의 묘사를 세운 이래 두 번째이며, 그녀는 국모의 예우를 받은 위대한 여성이었다. 그러므로 소서노는 온조왕의 어머니 뿐 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어머니인 것이다. 소서노 국모는 모든 역경 속에서도 시대의 흐름에 타협하는 일생을 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흐름을 자신의 슬기로 조정할 수 있었던 지혜로운 여성이었으니, 연약한 여인 소서노의 그러한 큰 힘과 슬기는 사랑하는 남편 주몽을 능히 왕위에 세울 수 있었으며, 아들 온조가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어머니로서의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자신의 남편을 위하고 아들의 나라 창업을 위하여 스스로 뛰어들었던 용감한 여인을 국모라 불러서 부족함이 있으랴!

또 사당을 세우고 온 나라 어머니들의 귀감을 삼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렇게 위대한 어머니의 슬기로운 사상은 백제 700년의 역사를 찬연히 꽃 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제31대 의자왕은 그러한 어머니의 존귀한 사상을 망각한 채 3000 궁녀들을 궐 안에 두고 오직 성(性)의 향연과 방탕으로 마침내 그 사직(社稷)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의자왕도 처음에는 해동의 증자로 불리워진 지극한 효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만년에 선도와 방술가들의 꼬임에 빠져 3000 궁녀의 정기(精氣)를 독점, 호흡하려는 중국 팽조 700년 수를 꿈꾸다가 서기 660년에 나·당 연합군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중국은 춘추 때부터 아버지의 교훈을 중시했다. 즉, 공·맹자의 가훈(家訓) 등이 흔히 언급된다. 이에 비해 우리는 삼국, 아니 그보다 훨씬 앞선 선사시대부터 어머니의 가정생활이 우리의 가훈이 되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상을 많이 잃었다.

송나라는 우리의 어머니 상을 가져다가 그들 우신관에 비장해 두고 우리 민족을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속국으로 만드는데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위대하고 성스러운 우리의 어머니 상을 그들은 선도산의 서왕모에 견주어 많은 낭설(浪說)을 만들어 냈다. 한나라 고조가 북융을 치다가 참패하여 자신의 공주를 바치고 겨우 그 생명을 보존했다. 그런데도 서왕모가 한 고조를 위하여 3000년 만에 열매를 맺은 선도를 보내 왔다고 한다. 그 밖에도 선도가들은 장수의 비결로써 소녀경 같은 책자를 만들어 세상 어머니들의 품격을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무릇 우리들이 알고 있는 농경생활은 주로 이조 때의 농경생활을 그대로 답습한 풍속을 위조로 알고 있다. 말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벼슬하는 관헌 다음이 농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대부의 가문이 아니면 어찌 농군이 벼슬을 해 볼 수가 있었던가? <다음호에 계속>

<이 소설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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